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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251호

■ 시선집중

“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형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함경남도 신포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입니다. 집안 형편상 학교는 지금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7월 말에 우리 집 식량 사정이 너무 힘들어 강원도 세포군에 살고 있는 고모네 집에 아버지와 함께 식량을 구하러 갔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잘 다니지 않던 아버지인데 너무나도 먹고 살기가 바빠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 만나는 순간 고모가 맨발 바람으로 달려 나와서 아버지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오빠가 동생 집을 찾아왔는가?” 하면서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고모가 시집간 후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렇게 사이가 좋던 고모네 부부가 서로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더 있자니 눈치가 보여 20여 년 만에 고모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고모부가 세포군에서 한 자리한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배낭을 크게 만들어서 세 개나 가져갔는데 배낭에는 먹을 것은 못 넣고, 돈 3만원과 고모네가 입던 옷들만 채워왔습니다. 세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 돈을 쓰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함께 9일 동안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도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돈이 다 없어졌습니다.

얼마 전에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삼촌이 우리 집에 들렀습니다. 삼촌도 먹을 것을 좀 구할까 싶어 세포에 사는 고모네 집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삼촌은 고모에게 줄 선물로 마른 낙지(오징어)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 달랑 돈 1만원을 쥐어 주더라면서, 선물로 가져간 물고기 값 본전도 안 된다고 푸념했습니다. 삼촌은 “그렇게 시집 잘 갔다던 누이네 생활도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더라”며 별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막막해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형이면서 삼촌에게 아무 도움도 못 주는 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삼촌은 그런 말 하지 말고, 형님 건강이나 잘 챙기라고 하면서 밤새 얼마 안 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습니다. 저도 아직 9살 밖에 안 된 제 동생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동생이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을 만큼 돈을 잘 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떡 하나 때문에 동무 사이가 끝났습니다”

저는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입니다. 추석이 끝나고 하루 뒤가 바로 제 생일이었습니다. 제 단짝 동무가 집에 놀러 와서 밖에서 놀면서 가족들 몰래 떡을 2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다 먹고도 배고프다고 떡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떡이 한 그릇밖에 없으니 더 못 주겠다고 했습니다. 더 주면 나 혼자만 먹었다고 식구들한테 욕을 먹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동무가 화를 내면서 “다시는 너와 만나지 않을 거다”고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생일이라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감자떡인데, 오빠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 저는 한 개도 먹지 않고 배고파하는 동무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떡 한 개 더 안줬다고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는 동무가 정말 야속했습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봐도 아는 척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떡 하나 때문에 동무 사이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 경제활동

“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형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함경남도 신포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입니다. 집안 형편상 학교는 지금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7월 말에 우리 집 식량 사정이 너무 힘들어 강원도 세포군에 살고 있는 고모네 집에 아버지와 함께 식량을 구하러 갔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잘 다니지 않던 아버지인데 너무나도 먹고 살기가 바빠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 만나는 순간 고모가 맨발 바람으로 달려 나와서 아버지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오빠가 동생 집을 찾아왔는가?” 하면서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고모가 시집간 후 처음 만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렇게 사이가 좋던 고모네 부부가 서로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더 있자니 눈치가 보여 20여 년 만에 고모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고모부가 세포군에서 한 자리한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배낭을 크게 만들어서 세 개나 가져갔는데 배낭에는 먹을 것은 못 넣고, 돈 3만원과 고모네가 입던 옷들만 채워왔습니다. 세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 돈을 쓰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함께 9일 동안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도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돈이 다 없어졌습니다.

얼마 전에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삼촌이 우리 집에 들렀습니다. 삼촌도 먹을 것을 좀 구할까 싶어 세포에 사는 고모네 집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삼촌은 고모에게 줄 선물로 마른 낙지(오징어)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 달랑 돈 1만원을 쥐어 주더라면서, 선물로 가져간 물고기 값 본전도 안 된다고 푸념했습니다. 삼촌은 “그렇게 시집 잘 갔다던 누이네 생활도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더라”며 별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막막해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형이면서 삼촌에게 아무 도움도 못 주는 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삼촌은 그런 말 하지 말고, 형님 건강이나 잘 챙기라고 하면서 밤새 얼마 안 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습니다. 저도 아직 9살 밖에 안 된 제 동생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동생이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을 만큼 돈을 잘 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떡 하나 때문에 동무 사이가 끝났습니다”

저는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입니다. 추석이 끝나고 하루 뒤가 바로 제 생일이었습니다. 제 단짝 동무가 집에 놀러 와서 밖에서 놀면서 가족들 몰래 떡을 2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다 먹고도 배고프다고 떡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떡이 한 그릇밖에 없으니 더 못 주겠다고 했습니다. 더 주면 나 혼자만 먹었다고 식구들한테 욕을 먹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동무가 화를 내면서 “다시는 너와 만나지 않을 거다”고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생일이라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감자떡인데, 오빠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 저는 한 개도 먹지 않고 배고파하는 동무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떡 한 개 더 안줬다고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는 동무가 정말 야속했습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봐도 아는 척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떡 하나 때문에 동무 사이가 끝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