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군사강국이면 뭐하나?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서 추운 날이 계속 되자, 함경남도 함흥시 주민들은 너무 등골이 시려 잠을 못 자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간부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이야 석탄이나 땔나무들을 넉넉하게 집에 쌓아두고 있지만, 일반 주민들은 그때그때 마련하러 다녀야 한다. 석탄을 못 구한 날은 땔나무를 구해야 하고, 땔나무를 구입하지 못한 날은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들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조차 구하지 못하는 날에는 난방은 꿈도 못 꾸고, 겨우 밥 짓는 데만 잠깐 사용한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은 춥다고 징징대고, 노인들은 고통스럽다 말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한다. 집안 벽에는 서리와 물방울이 끼고,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하면 방에 있어도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이다. 너무 추워서 옷을 벗고 잘 수가 없으니, 밤낮 똑같은 옷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낮에 돌아다니던 외출복 그대로 집안에서도 생활하다가 그대로 잠을 잔다. 안팎 기온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뱃속이라도 따뜻하면 어느 정도 냉기를 가실 수 있을 텐데, 워낙 먹는 게 부실하다보니 춥고 배고픈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때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전시켰다느니 위성을 발사하고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으니 우리는 세계 최강 군사 강국이라느니 하는 당의 선전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군사대국이면 뭘 하나. 근 20년이 넘도록 백성들의 생활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간부들만 사람 취급 받고 백성은 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군사대국, 강성대국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울분을 터뜨리는 주민들이 많다.

“김정은 탄생일, 크게 경축해야할 명절”

지난 10월 중순부터 함경북도 회령시 시당 선전부에서는 각 공장, 기관, 기업소 당비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4차 당대표자회 방침을 관철, 집행하기 위한 강연회를 진행했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높이 받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령도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옹호하고 받들어, 2012년에 기어코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 내자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청년대장의 위대한 업적을 찬미하고, 또 한 분의 절세 위인을 모시게 된 영광과 긍지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강연 도중에 시당 선전부장이 앞줄에 앉은 한 기업소의 당 비서를 일으켜 세워 “우리나라에는 민족의 경사와 명절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보시오”라고 물었다. 당 비서는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금새 2․16 명절과 4․15 태양절, 4․25, 9․9절, 10․10 당창건 기념일, 그 외 양력설과 청명, 추석 등을 줄줄이 읊었다. 그러나 대답을 다 듣고 난 선전부장은 한숨을 쉬면서 “동무는 아직 학습을 많이 해야 겠소”라면서,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에는 청년대장께서 탄생하신 1월 8일도 가장 크게 경축할 명절로 들어가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했다. 당시 같이 있었던 당비서들은 미처 김정은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생일을 몰랐던 탓에 저마다 수첩을 꺼내 날짜를 적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한 간부는 눈치 없는 위인들이라며 그것을(생일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고 혀를 끌끌 찼다.

풍서리 고아원, “국가에서 지원해주어야”

온성군 풍서리 고아원 원장부부의 악명이 높은 가운데, 고아원 사정을 잘 아는 조금선(가명)씨는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라며, 리희순씨를 적극 변호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내가 리희순을 계속 지켜봐왔지만, 좋은 사람이다. 처음에 정말 좋은 마음으로 고아들을 하나 둘 데려다 키웠는데, 나라에서 막 떠들어 추켜세우며 아이들을 떠맡겨 갑자기 170명까지 늘어났다. 국가에서 아이들을 많이 키우라고 하니 너무 힘들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자력갱생하라고 농토를 주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국가에서 지원해준 게 없었다. 농토를 누가 가꾸어야 하나. 농장원들이 배치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되겠고. 리희순과 세대주 두 사람 힘으로 170명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동원해서 일을 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런 폐단이 나온 것이다. 국제단체들에서 지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운영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부부가 빼돌려 먹은 것도 있겠지. 그건 잘못이지만, 그렇게 안 빼돌려먹는 사람이 지금 우리 조선에서 몇이나 되겠나. 그것 가지고 뭐라 할 것 같으면 간부들부터 다 처벌해야 한다. 사람이 원래 나쁜 게 아니라, 제도가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조씨는 리희순 부부의 일부 행위가 악행으로 비쳐질 소지는 충분하지만, 그것은 그 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고 있어서라고 지적했다. 그는 “처음 그들 부부가 하고자 했던 대로 한두 명, 혹은 서너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수준이었으면 모르되, 100여 명이 넘는 고아들을 데리고 사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적 차원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아원 운영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리씨가 아닌 다른 어떤 도덕군자가 맡더라도 마찬가지 폐단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웅칭호 받은 풍서리 고아원 원장, 아동착취로 악명 높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고아원은 모성영웅칭호를 받은 리희순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리씨는 자발적으로 고아들을 거둬 키워, 북한 매체에서 앞 다퉈 “서혜숙, 리희순을 닮자”는 깜빠니아(캠페인)를 벌일 정도로 유명해졌다. 리씨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94년 군복무 하던 아들이 사망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면서, 고아들이 우후죽순 늘어날 때였다. 리씨는 기차역에서 만난 고아를 보고 죽은 아들을 떠올려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그 뒤 하나 둘 입양하기 시작해 무려 170여 명까지 데리고 있게 됐다. 리씨의 선행은 조선중앙방송은 물론이고, 문학 소재에까지 등장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감동했고, 저마다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적극 선전해준 덕분에 풍서리 고아원은 그 후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남한 단체들과 국제구호단체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말에는 WFP 분배 요원들이 함경북도 온성군의 분배 상태를 점검하러 갔을 당시, 온성군은 풍서리 고아원을 고아들의 건강상태와 생활상을 점검할 곳으로 자랑스럽게 안내했었다.

국가적인 유명세와 지원이 이들의 초심을 흔들리게 했을까? 풍서리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리희순씨 부부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지 않다. 고아원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주민들은 거침없이 이들 부부의 행태를 질타한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유추해보면 고아원내에서 ‘강제노동’과 ‘학대’, “지원물품 착복“이 거침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풍서리에 사는 주민 리경실(가명)씨는 “몇 년 동안 꽃제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밭일을 할 만하고 나이 좀 있는 아이들만 데리고 왔다. 허약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머리가 나쁜 애들은 제 발로 찾아오더라도 다 쫓아냈다”며, 고아들을 받아들일 때부터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얼마나 일을 부려먹는지, 농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나이가 좀 있는 남자아이들도 고생스러워한다고 했다. 한 보안원은 “고아원에서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서 올해에도 벌써 10명 이상의 남자아이들이 뛰쳐나왔다. 그중 몇몇은 시장에서 도적질하다가 붙잡혀 우리 구류소에 온 적도 있다. 왜 도적질 했냐고 했더니, 아이들 말이 ‘밤낮으로 소나 말처럼 시달리다보니 진절머리가 나서 일부러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얼마 전에는 고아원 밭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팔려고 청진에 가다가 차가 전복돼 3명의 남자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주민들은 죽은 아이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 부부의 악행이 환멸스럽다고 말한다. 안으로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밖으로는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자비로운 척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영란(가명)씨는 심지어 여자아이들이 리씨의 남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처녀애들 몇 명이 그 집 세대주에게 성희롱 당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집 부부는 조선 왕보다 더 하다. 발도 자기들이 안 씻는다. 여자아이들이 물 떠다가 부부 발을 씻겨준다. 그러다가 처녀아이들이 스무살이 넘어가면 더 이상 데리고 있기 뭐하니까 영예군인(상이군인)들에게 강제로 시집 보내버린다. 그것도 모르고 나라에서는 장가 못 가는 영예군인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나라의 공신이라고 떠들어 댄다”고 했다. 김명성(가명)씨는 이들 부부가 착복하는 재산이 상당하다고 했다. 중국이나 유엔, 남한 단체들에서 지원해준 물품들을 청진에 내다팔아 자기 주머니를 채운다는 것이다. 고아원에 들어오는 각종 식품과 의약품, 옷가지 들을 되거리 장사 해서 팔아버리고는 정작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인근 주민들은 고아원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모두들 혀를 차며, “아이들을 너무 혹독하게 대한다. 꼭 옛날 지주가 머슴 부려먹듯이 하고, 참다운 인간 대접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성 침해를 하는데 여기 사람들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분개한다. “이런 사람들더러 아이들을 잘 보살핀다며 나라에서 추켜세워 주니, (비)웃지 않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아마 당에서도 알고 있는데 하도 국가적으로 떠들어놨으니 아무 손도 못 대고 있는 건지 모른다. 당 간부들 중에는 이 부부한테 얻어먹은 게 많은 간부들도 있을 거다. 이렇게 놔두지 말고 아이들이 참다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당에서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너도나도 우려했다. 풍서리 고아원의 원생 수는 170명에서 점점 줄어 2008년 당시 150여명이었다가, 지금은 100여 명 남짓으로 줄었다.

대홍단군 주민들, “소토지 농사 하게 해 달라”

량강도 대홍단군에서는 소토지 농사를 못 짓는다. 대부분이 산지이기 때문에 산불 위험이 높고, 개인 이기주의를 부리느라 국가 일에 종사를 하지 않는다며 당에서 소토지 농사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가에서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소토지 농사를 못 짓게 하면, 우리더러 살지 말라는 소리냐”는 것이다. 무산과 혜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소토지 농사를 허용한 지역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삼봉노동자구에 사는 신현덕(가명)씨는 친척이 온성에 사는데, 온성군은 소토지 농사를 전국적으로 금지시켰던 작년에도 군당 자체적으로 소토지 농사를 허용해주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온성에서도 처음에는 소토지를 회수하거나 농사를 금지시켰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고 식량문제가 심각해 허용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작년 말 화폐교환 조치 이후 전국적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때에도, 온성군만은 굶주림을 면해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씨는 이를 동료들에게 전했고, 주민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갔다. 온성군당도 하는데 왜 우리 군당은 그런 배려를 해주지 못하느냐고 노골적으로 제기하는 주민들이 생겨났다. 최소한 “오랜 병으로 국가 일에 종사하지 못하는 장기 환자들이나 늙은이들에게 만이라도 소토지 농사를 짓도록 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대홍단군 농민들, “제대군인 정착은 악몽”

대홍단군에서는 내년 4월에 제대군인들이 백암군에 1,000명 이상 집단 배치된다는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1999년에 대대적으로 이주한 제대군인들도 고생이었지만, 그들과 같이 살아야 했던 지역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제대군인들에 대한 각종 특혜에 대홍단군 주민들 사이에는 한때, “우리는 사람이 아니고, 저 1,200명만 사람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농장원들도 “저 사람들에게만 식량을 주는 걸 보면, 농사는 저 1,200명만 짓는 가 보다. 그러니 우리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국가의 차별대우는 자연히 대홍단군의 원래 주민들과 새로 정착하러 들어온 제대군인 사이에 감정적인 골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대군인들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식량난으로 분배량이 줄어들면서 제대군인 가족들은 배려로 받았던 그릇 세트와 이불, 갖가지 살림도구, 그리고 텔레비전 등을 내다팔아 생계를 연명했다. 살림집마저 팔아야 하는 집도 있었다.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어지다 보니, 농작물과 농약, 비료 등 농사 기자재 등에 손대는 사람들도 늘었다. 일반 농장원들이 빼돌리고 발각될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았지만 제대군인들은 비교적 가벼운 경고나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 또한 농민들의 빈축을 샀다. 농장원 김해성(가명)씨는 “장군님 방침으로 제대군인들이기 때문에 다 용서해 주고 약간의 처벌 이라든가 교양 처리로 끝난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했다. 제대군인들의 생활도 비참하고 힘들었지만, 그들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원 주민들의 맘고생도 컸기 때문에 제대군인 집단 배치는 당사자들이나 주변인들 모두에게 악몽으로 각인돼있다.

대홍단군 제대군인 무리배치 성과 없어

이 같은 방침은 1999년 대홍단군에 제대군인 1,200명을 무리 배치했던 것과 비슷하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홍단군을 시찰한 뒤 감자농사를 잘 짓기 위해 제대군인을 무리 배치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듬해 량강도 당위원회의 지도 아래 혜산시를 비롯해 백암군, 삼지연군, 삼수군 등 관내 행정구역마다 최소 10동에서 최대 20동까지 맡아 살림집을 건설했었다. 제대군인용 주택은 총 190여 동 350여 세대로, 1동 1세대 또는 1동 2세대로 설계됐다. 식량 배급은 물론이고, 텔레비전과 의약품, 그릇세트, 담요 2장, 이불 등을 내주었고, 양복과 당과류 등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국영상점에 가면 일반 주민들에게 공급할 물건은 없어도, 제대군인들 몫은 따로 챙겨주곤 했다. 심지어 간부를 임명해도 제대군인들 사이에서 뽑으라고까지 했다. 1999년 4월과 5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합동결혼식을 거행해주기도 했다. 대홍단군 제대군인들은 나라의 영웅으로 묘사됐고, 도시 처녀들이 시집을 가야 한다며 대대적인 선전을 했었다. 그러나 제대군인들에 대한 지원은 꾸준히 지속되지 못했다. 2005년 하반기에 배급재개를 하겠다고 반짝 선전하기도 했지만, 이듬해부터 식량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는 척박한 량강도의 식량 사정은 더 열악했다. 제대군인들의 집단 이주 생활은 비참해져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요령껏 다 떠나버리고,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제대군인 가족의 이혼율이 높은 것도 사회 문제가 됐다. 원체 살아온 풍습이 달라 부부가 불화하는 집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배급이 중단돼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지면서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혼에 응한 남자들이 별로 없었고, 당에서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몰래 도망가는 여자들이 많았다. 졸지에 홀아비가 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두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감자도 제대로 못 먹는 비극적인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대홍단군의 실패를 겪고도 백암군에 다시 제대군인들을 집단 배치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백암군에 제대군인 1,000명 새로 정착 예정

량강도 백암군은 살림집 건설로 분주하다.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내년 4월에 군복무를 마친 1,000명의 제대군인들을 입주시켜야 한다. 량강도 당국에서는 백암군이 전체 건설비용을 떠맡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관내 각 군마다 살림집을 최소 10-20동 이상 짓도록 분담시켰다. “일체 (결혼)식장부터 시작해 밥숟가락까지 다 해주어야 한다”는 방침도 내려졌다. 량강도 도당에서는 차마 말은 못하지만 벌써부터 제대군인 지원 자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등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사회

“군사강국이면 뭐하나?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서 추운 날이 계속 되자, 함경남도 함흥시 주민들은 너무 등골이 시려 잠을 못 자고 있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간부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이야 석탄이나 땔나무들을 넉넉하게 집에 쌓아두고 있지만, 일반 주민들은 그때그때 마련하러 다녀야 한다. 석탄을 못 구한 날은 땔나무를 구해야 하고, 땔나무를 구입하지 못한 날은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들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조차 구하지 못하는 날에는 난방은 꿈도 못 꾸고, 겨우 밥 짓는 데만 잠깐 사용한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은 춥다고 징징대고, 노인들은 고통스럽다 말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한다. 집안 벽에는 서리와 물방울이 끼고,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하면 방에 있어도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이다. 너무 추워서 옷을 벗고 잘 수가 없으니, 밤낮 똑같은 옷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낮에 돌아다니던 외출복 그대로 집안에서도 생활하다가 그대로 잠을 잔다. 안팎 기온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뱃속이라도 따뜻하면 어느 정도 냉기를 가실 수 있을 텐데, 워낙 먹는 게 부실하다보니 춥고 배고픈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때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전시켰다느니 위성을 발사하고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으니 우리는 세계 최강 군사 강국이라느니 하는 당의 선전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군사대국이면 뭘 하나. 근 20년이 넘도록 백성들의 생활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간부들만 사람 취급 받고 백성은 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군사대국, 강성대국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울분을 터뜨리는 주민들이 많다.

“김정은 탄생일, 크게 경축해야할 명절”

지난 10월 중순부터 함경북도 회령시 시당 선전부에서는 각 공장, 기관, 기업소 당비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4차 당대표자회 방침을 관철, 집행하기 위한 강연회를 진행했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높이 받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령도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옹호하고 받들어, 2012년에 기어코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 내자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청년대장의 위대한 업적을 찬미하고, 또 한 분의 절세 위인을 모시게 된 영광과 긍지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강연 도중에 시당 선전부장이 앞줄에 앉은 한 기업소의 당 비서를 일으켜 세워 “우리나라에는 민족의 경사와 명절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보시오”라고 물었다. 당 비서는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금새 2․16 명절과 4․15 태양절, 4․25, 9․9절, 10․10 당창건 기념일, 그 외 양력설과 청명, 추석 등을 줄줄이 읊었다. 그러나 대답을 다 듣고 난 선전부장은 한숨을 쉬면서 “동무는 아직 학습을 많이 해야 겠소”라면서,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에는 청년대장께서 탄생하신 1월 8일도 가장 크게 경축할 명절로 들어가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했다. 당시 같이 있었던 당비서들은 미처 김정은 당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생일을 몰랐던 탓에 저마다 수첩을 꺼내 날짜를 적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한 간부는 눈치 없는 위인들이라며 그것을(생일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고 혀를 끌끌 찼다.

대홍단군 농민들, “제대군인 정착은 악몽”

대홍단군에서는 내년 4월에 제대군인들이 백암군에 1,000명 이상 집단 배치된다는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1999년에 대대적으로 이주한 제대군인들도 고생이었지만, 그들과 같이 살아야 했던 지역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제대군인들에 대한 각종 특혜에 대홍단군 주민들 사이에는 한때, “우리는 사람이 아니고, 저 1,200명만 사람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농장원들도 “저 사람들에게만 식량을 주는 걸 보면, 농사는 저 1,200명만 짓는 가 보다. 그러니 우리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국가의 차별대우는 자연히 대홍단군의 원래 주민들과 새로 정착하러 들어온 제대군인 사이에 감정적인 골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대군인들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식량난으로 분배량이 줄어들면서 제대군인 가족들은 배려로 받았던 그릇 세트와 이불, 갖가지 살림도구, 그리고 텔레비전 등을 내다팔아 생계를 연명했다. 살림집마저 팔아야 하는 집도 있었다.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어지다 보니, 농작물과 농약, 비료 등 농사 기자재 등에 손대는 사람들도 늘었다. 일반 농장원들이 빼돌리고 발각될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았지만 제대군인들은 비교적 가벼운 경고나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 또한 농민들의 빈축을 샀다. 농장원 김해성(가명)씨는 “장군님 방침으로 제대군인들이기 때문에 다 용서해 주고 약간의 처벌 이라든가 교양 처리로 끝난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했다. 제대군인들의 생활도 비참하고 힘들었지만, 그들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원 주민들의 맘고생도 컸기 때문에 제대군인 집단 배치는 당사자들이나 주변인들 모두에게 악몽으로 각인돼있다.

대홍단군 제대군인 무리배치 성과 없어

이 같은 방침은 1999년 대홍단군에 제대군인 1,200명을 무리 배치했던 것과 비슷하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홍단군을 시찰한 뒤 감자농사를 잘 짓기 위해 제대군인을 무리 배치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듬해 량강도 당위원회의 지도 아래 혜산시를 비롯해 백암군, 삼지연군, 삼수군 등 관내 행정구역마다 최소 10동에서 최대 20동까지 맡아 살림집을 건설했었다. 제대군인용 주택은 총 190여 동 350여 세대로, 1동 1세대 또는 1동 2세대로 설계됐다. 식량 배급은 물론이고, 텔레비전과 의약품, 그릇세트, 담요 2장, 이불 등을 내주었고, 양복과 당과류 등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국영상점에 가면 일반 주민들에게 공급할 물건은 없어도, 제대군인들 몫은 따로 챙겨주곤 했다. 심지어 간부를 임명해도 제대군인들 사이에서 뽑으라고까지 했다. 1999년 4월과 5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합동결혼식을 거행해주기도 했다. 대홍단군 제대군인들은 나라의 영웅으로 묘사됐고, 도시 처녀들이 시집을 가야 한다며 대대적인 선전을 했었다. 그러나 제대군인들에 대한 지원은 꾸준히 지속되지 못했다. 2005년 하반기에 배급재개를 하겠다고 반짝 선전하기도 했지만, 이듬해부터 식량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는 척박한 량강도의 식량 사정은 더 열악했다. 제대군인들의 집단 이주 생활은 비참해져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요령껏 다 떠나버리고,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제대군인 가족의 이혼율이 높은 것도 사회 문제가 됐다. 원체 살아온 풍습이 달라 부부가 불화하는 집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배급이 중단돼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지면서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혼에 응한 남자들이 별로 없었고, 당에서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몰래 도망가는 여자들이 많았다. 졸지에 홀아비가 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두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감자도 제대로 못 먹는 비극적인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대홍단군의 실패를 겪고도 백암군에 다시 제대군인들을 집단 배치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백암군에 제대군인 1,000명 새로 정착 예정

량강도 백암군은 살림집 건설로 분주하다.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내년 4월에 군복무를 마친 1,000명의 제대군인들을 입주시켜야 한다. 량강도 당국에서는 백암군이 전체 건설비용을 떠맡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관내 각 군마다 살림집을 최소 10-20동 이상 짓도록 분담시켰다. “일체 (결혼)식장부터 시작해 밥숟가락까지 다 해주어야 한다”는 방침도 내려졌다. 량강도 도당에서는 차마 말은 못하지만 벌써부터 제대군인 지원 자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등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여성/어린이/교육

풍서리 고아원, “국가에서 지원해주어야”

온성군 풍서리 고아원 원장부부의 악명이 높은 가운데, 고아원 사정을 잘 아는 조금선(가명)씨는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라며, 리희순씨를 적극 변호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내가 리희순을 계속 지켜봐왔지만, 좋은 사람이다. 처음에 정말 좋은 마음으로 고아들을 하나 둘 데려다 키웠는데, 나라에서 막 떠들어 추켜세우며 아이들을 떠맡겨 갑자기 170명까지 늘어났다. 국가에서 아이들을 많이 키우라고 하니 너무 힘들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자력갱생하라고 농토를 주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국가에서 지원해준 게 없었다. 농토를 누가 가꾸어야 하나. 농장원들이 배치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되겠고. 리희순과 세대주 두 사람 힘으로 170명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동원해서 일을 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런 폐단이 나온 것이다. 국제단체들에서 지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운영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부부가 빼돌려 먹은 것도 있겠지. 그건 잘못이지만, 그렇게 안 빼돌려먹는 사람이 지금 우리 조선에서 몇이나 되겠나. 그것 가지고 뭐라 할 것 같으면 간부들부터 다 처벌해야 한다. 사람이 원래 나쁜 게 아니라, 제도가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조씨는 리희순 부부의 일부 행위가 악행으로 비쳐질 소지는 충분하지만, 그것은 그 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고 있어서라고 지적했다. 그는 “처음 그들 부부가 하고자 했던 대로 한두 명, 혹은 서너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수준이었으면 모르되, 100여 명이 넘는 고아들을 데리고 사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적 차원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아원 운영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리씨가 아닌 다른 어떤 도덕군자가 맡더라도 마찬가지 폐단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웅칭호 받은 풍서리 고아원 원장, 아동착취로 악명 높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고아원은 모성영웅칭호를 받은 리희순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리씨는 자발적으로 고아들을 거둬 키워, 북한 매체에서 앞 다퉈 “서혜숙, 리희순을 닮자”는 깜빠니아(캠페인)를 벌일 정도로 유명해졌다. 리씨가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94년 군복무 하던 아들이 사망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면서, 고아들이 우후죽순 늘어날 때였다. 리씨는 기차역에서 만난 고아를 보고 죽은 아들을 떠올려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그 뒤 하나 둘 입양하기 시작해 무려 170여 명까지 데리고 있게 됐다. 리씨의 선행은 조선중앙방송은 물론이고, 문학 소재에까지 등장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감동했고, 저마다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적극 선전해준 덕분에 풍서리 고아원은 그 후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남한 단체들과 국제구호단체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말에는 WFP 분배 요원들이 함경북도 온성군의 분배 상태를 점검하러 갔을 당시, 온성군은 풍서리 고아원을 고아들의 건강상태와 생활상을 점검할 곳으로 자랑스럽게 안내했었다.

국가적인 유명세와 지원이 이들의 초심을 흔들리게 했을까? 풍서리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리희순씨 부부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지 않다. 고아원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주민들은 거침없이 이들 부부의 행태를 질타한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유추해보면 고아원내에서 ‘강제노동’과 ‘학대’, “지원물품 착복“이 거침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풍서리에 사는 주민 리경실(가명)씨는 “몇 년 동안 꽃제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밭일을 할 만하고 나이 좀 있는 아이들만 데리고 왔다. 허약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머리가 나쁜 애들은 제 발로 찾아오더라도 다 쫓아냈다”며, 고아들을 받아들일 때부터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얼마나 일을 부려먹는지, 농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나이가 좀 있는 남자아이들도 고생스러워한다고 했다. 한 보안원은 “고아원에서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서 올해에도 벌써 10명 이상의 남자아이들이 뛰쳐나왔다. 그중 몇몇은 시장에서 도적질하다가 붙잡혀 우리 구류소에 온 적도 있다. 왜 도적질 했냐고 했더니, 아이들 말이 ‘밤낮으로 소나 말처럼 시달리다보니 진절머리가 나서 일부러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얼마 전에는 고아원 밭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팔려고 청진에 가다가 차가 전복돼 3명의 남자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주민들은 죽은 아이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 부부의 악행이 환멸스럽다고 말한다. 안으로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밖으로는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자비로운 척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영란(가명)씨는 심지어 여자아이들이 리씨의 남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처녀애들 몇 명이 그 집 세대주에게 성희롱 당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집 부부는 조선 왕보다 더 하다. 발도 자기들이 안 씻는다. 여자아이들이 물 떠다가 부부 발을 씻겨준다. 그러다가 처녀아이들이 스무살이 넘어가면 더 이상 데리고 있기 뭐하니까 영예군인(상이군인)들에게 강제로 시집 보내버린다. 그것도 모르고 나라에서는 장가 못 가는 영예군인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나라의 공신이라고 떠들어 댄다”고 했다. 김명성(가명)씨는 이들 부부가 착복하는 재산이 상당하다고 했다. 중국이나 유엔, 남한 단체들에서 지원해준 물품들을 청진에 내다팔아 자기 주머니를 채운다는 것이다. 고아원에 들어오는 각종 식품과 의약품, 옷가지 들을 되거리 장사 해서 팔아버리고는 정작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인근 주민들은 고아원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모두들 혀를 차며, “아이들을 너무 혹독하게 대한다. 꼭 옛날 지주가 머슴 부려먹듯이 하고, 참다운 인간 대접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성 침해를 하는데 여기 사람들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분개한다. “이런 사람들더러 아이들을 잘 보살핀다며 나라에서 추켜세워 주니, (비)웃지 않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아마 당에서도 알고 있는데 하도 국가적으로 떠들어놨으니 아무 손도 못 대고 있는 건지 모른다. 당 간부들 중에는 이 부부한테 얻어먹은 게 많은 간부들도 있을 거다. 이렇게 놔두지 말고 아이들이 참다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당에서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너도나도 우려했다. 풍서리 고아원의 원생 수는 170명에서 점점 줄어 2008년 당시 150여명이었다가, 지금은 100여 명 남짓으로 줄었다.

■ 식량소식

대홍단군 주민들, “소토지 농사 하게 해 달라”

량강도 대홍단군에서는 소토지 농사를 못 짓는다. 대부분이 산지이기 때문에 산불 위험이 높고, 개인 이기주의를 부리느라 국가 일에 종사를 하지 않는다며 당에서 소토지 농사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가에서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소토지 농사를 못 짓게 하면, 우리더러 살지 말라는 소리냐”는 것이다. 무산과 혜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소토지 농사를 허용한 지역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삼봉노동자구에 사는 신현덕(가명)씨는 친척이 온성에 사는데, 온성군은 소토지 농사를 전국적으로 금지시켰던 작년에도 군당 자체적으로 소토지 농사를 허용해주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온성에서도 처음에는 소토지를 회수하거나 농사를 금지시켰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고 식량문제가 심각해 허용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작년 말 화폐교환 조치 이후 전국적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때에도, 온성군만은 굶주림을 면해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씨는 이를 동료들에게 전했고, 주민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갔다. 온성군당도 하는데 왜 우리 군당은 그런 배려를 해주지 못하느냐고 노골적으로 제기하는 주민들이 생겨났다. 최소한 “오랜 병으로 국가 일에 종사하지 못하는 장기 환자들이나 늙은이들에게 만이라도 소토지 농사를 짓도록 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