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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51호

■ 시선집중

려행증명서 빚에, 간부들 선물까지 이중부담

성국씨는 간부들로부터 연길에서 사다달라고 부탁받은 물품을 적은 종이가 석장이나 되는 것에 암담해했다. 이런 물건들은 시장이나 화교들의 집에 가면 다 살 수 있는 물건들인데도 굳이 연길에 가는 자기에게 구해달라고 한 것이다. 어림잡아도 인민폐로 3,000위안은 들겠다. 려행증 수속에 이미 3,000위안을 썼는데, 간부들의 선물을 구입하는데 3천 위안을 더 쓰게 생겼다. 마른 낙지 2드럼과 명태 5드럼, 고려 인삼차 한 상자를 가방에 짊어졌지만, 등짐보다 종이 석 장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성국씨는 려행증명서를 수속하기위해 화교 왕씨에게 손도장을 세 번이나 찍은 서류를 내고서야 인민폐 3천 위안을 변통할 수 있었다. 3개월 후에 4천 위안으로 갚아주기로 했는데, 연길에 사는 사촌형의 신원이 확실해서 빌려준다고 했다. 연길에서 큰 기업소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촌형은 큰 집에 큰 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돈이 많다고 했다. 집안 내력이 좋고, 지금까지 친인척 중에 행불자가 한 명도 없는데다가 처남댁의 오빠가 도당에서 일하는 연줄로 사사려행증을 얻을 수 있었다. 남들은 5년, 10년도 걸린다는데 성국씨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닌 덕분에 한 달 만에 손에 쥘 수 있었다. 유효기한은 한 달이지만, 닷새가 지나서야 통행증을 쥐었다. 게다가 각종 학습에 보위부 외사지도원 동지, 담당 보위부원, 보안원 등과 담화하는데 또 이틀을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자랑스러운 공민으로 산다는 긍지감을 보여주고 비록 잠시나마 어려운 상태이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주체의 횃불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타오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로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연길에 가면 남조선 간첩들이 쫙 깔렸으니 절대 낯선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것” 등 다들 비슷비슷한 얘기들이었다. 려행증명서를 얻어 두만강을 건너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간부들에게 바칠 선물 목록을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촌형이 아무리 잘 산다지만, 최소 6천 위안은 넘게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그만한 돈을 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사촌형이 배포가 크기만을 바랄 뿐이다

“간도 이민자 마음이 꼭 우리 같지 않았을까?”

림철씨는 두만강 다리를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면서 문득 일제 강점시기에 간도 땅으로 떠났던 수많은 이민자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때 사람들과 지금 자신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100년 전, 나라 잃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 한 자락 품고 두만강을 건너 세찬 바람이 부는 만주 벌판으로 나아갔으리라. 나라를 잃은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길이 없어 고향 땅을 등져야 하는 것이 꼭 그와 같아 보였다. 림철씨의 일행은 4명이었다. 화룡으로 가는 50대 아주머니 한 명과 도문 친척 집을 찾아가는 40대 아주머니, 장백현에 사촌형이 있다는 50대 남자 한 명, 그리고 연길시에 장사하러 나간다는 50대 남자 한 명이었다. 온성 사람 2명에 함경남도 함주와 함흥에서 온 2명은 똑같이 마른 낙지를 두 배낭씩 들고 있었다. 다들 려행증을 수속하는데 엄청난 돈과 인내심이 필요했었다고 했다. 5년 만에 려행증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2명은 3년 걸렸고, 나머지 한 명은 2년 걸렸다고 했다. 모두들 보름 안에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요즘 려행증을 받기가 더 까다로워졌는데, 모든 서류 조건을 갖춘다 해도, 기업소 책임자나 상급 간부의 보증이 없으면 발급을 못 받는다. 사사려행자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림철씨는 그들의 이야기를 참고해 엇비슷하게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다시 고향땅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먹고 살 길이 없고, 려행증을 받는데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길에 고모할머니가 있어서 찾아가기는 해도 반겨줄지 의문이다. 친척집에 오래 있을 수는 없기에 그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라도 취직자리를 얻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림철씨는 “일제 때 처자식 손잡고,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한 마지기 땅이라도 찾아보려고 간도로 넘어 가던 사람들의 심정도 이와 같지 않았겠느냐”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불안한 희천발전소

자강도 희천발전소의 시운전이 끝나고 본격 가동을 앞두고, 중앙당은 10년 이상 걸려야 한다던 발전소 건설을 단 3년 만에 끝냈다며 대대적인 포상과 축하를 했다. 희천발전소 설계부터 완공까지 고생한 일군들에게 노력영웅칭호 100여명을 포함해 김일성훈장, 김일성청년영예상, 공훈건설자 칭호, 국기훈장, 영예훈장 등 5만 7,872명을 표창하고, 건설노동자 7만 8,339명에게 기념메달을 수여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2010년 3월 5일 특별감사문까지 발표하면서,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건이며 사회주의의 대승리”라며 한껏 추켜올렸던 2.8비날론공장 개건 때의 포상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함흥시에서 10만 군중대회를 열며 축하했던 2.8비날론공장 개건식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74명이었다. 당시에도 파격적인 표창과 수여라고 했지만, 이번 희천발전소의 규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새 지도부의 격려와 기대가 클수록, 희천발전소 건설에 참가했던 당사자들은 불안할 뿐이다. 건설 시공에 참여했던 한 일군은 “원래 올해 1월 초부터 희천발전소 전기를 끌어다 평양에 24시간 전력 공급을 하려고 했다. 희천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작년 수해로 발전소 설비와 기자재들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액이 1천만 달러 이상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부랴부랴 해외일군들에게 돈을 차출해서 자재들을 새로 들여왔지만, 돈이 부족하니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완공을 했지만 아직까지 전압이 불안정하고 전력생산도 기대치만큼 나오지 않고 있다. 전력공급을 무리하게 하다보면 정전이 되거나 전압이 떨어진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계속 발생할 텐데, 뾰족한 대책은 없다. 설비를 새로 교체하려고 해도 막대한 자금이 들 것이고, 그러자면 교체 공사로 또 생산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야 웃고 있지만 사실 누구보다 속이 타는 건 우리들”이라며, 앞으로의 책임 문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평양시, 하루 20시간 전력공급

평양시는 최근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하루 전력공급 시간을 최대 20시간까지 늘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애도 기간 동안 하루에 1-2시간 공급하던 것에서 대폭 늘어난 것이다. 전력성의 한 간부는 “4월 15일 태양절을 기념해 모든 발전소를 가동해서라도 평양시 전력공급을 최우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다. 당초 계획은 수력, 화력발전소를 모두 가동해 24시간 전력공급을 실현하라는 지시였지만, 만가동은 어려워 최대 20시간 내외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했다. 태양절 기념행사를 맞이해 귀국한 해외대표부 일군들은 평양시의 전력사정이 크게 개선된 것에 놀라워했다. 한 일군은 “큰 개변이다. 모든 것이 다 전력문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전력문제가 이렇게 풀리는 모습을 보니, 이제 다 잘 풀릴 것 같다”고 크게 반가워했다. 하지만 모두 이런 기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국내 화력, 수력발전소의 생산량을 총동원해 전력공급을 하니 당장은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갈 지 장담할 수 없다는 시각이 많다.

황해도, “사람 죽는다 말 못해”

황해남도에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황해북도와 함경남도에서도 아사자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황해도와 함경남도 간부들은 연일 중앙당과 해외대표부에 “사람이 먹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좋으니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일부 간부들은 중국을 드나드는 일군들에게 벼나 옥수수종자를 몰래 들여와 달라는 부탁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얘기는 차마 못한다. 간혹 “고난의 강행군에서 고난의 초강행군을 넘어 이제는 경제 붕괴의 변두리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절망스러운 상황을 빗댈 뿐이다. 황해남도의 한 간부는 아사자 발생에 극구 함구하는 것은 국내외 안정을 최우선 기조로 삼고 있는 새 지도부에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사회

려행증명서 빚에, 간부들 선물까지 이중부담

성국씨는 간부들로부터 연길에서 사다달라고 부탁받은 물품을 적은 종이가 석장이나 되는 것에 암담해했다. 이런 물건들은 시장이나 화교들의 집에 가면 다 살 수 있는 물건들인데도 굳이 연길에 가는 자기에게 구해달라고 한 것이다. 어림잡아도 인민폐로 3,000위안은 들겠다. 려행증 수속에 이미 3,000위안을 썼는데, 간부들의 선물을 구입하는데 3천 위안을 더 쓰게 생겼다. 마른 낙지 2드럼과 명태 5드럼, 고려 인삼차 한 상자를 가방에 짊어졌지만, 등짐보다 종이 석 장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성국씨는 려행증명서를 수속하기위해 화교 왕씨에게 손도장을 세 번이나 찍은 서류를 내고서야 인민폐 3천 위안을 변통할 수 있었다. 3개월 후에 4천 위안으로 갚아주기로 했는데, 연길에 사는 사촌형의 신원이 확실해서 빌려준다고 했다. 연길에서 큰 기업소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촌형은 큰 집에 큰 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돈이 많다고 했다. 집안 내력이 좋고, 지금까지 친인척 중에 행불자가 한 명도 없는데다가 처남댁의 오빠가 도당에서 일하는 연줄로 사사려행증을 얻을 수 있었다. 남들은 5년, 10년도 걸린다는데 성국씨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닌 덕분에 한 달 만에 손에 쥘 수 있었다. 유효기한은 한 달이지만, 닷새가 지나서야 통행증을 쥐었다. 게다가 각종 학습에 보위부 외사지도원 동지, 담당 보위부원, 보안원 등과 담화하는데 또 이틀을 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자랑스러운 공민으로 산다는 긍지감을 보여주고 비록 잠시나마 어려운 상태이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주체의 횃불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타오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로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연길에 가면 남조선 간첩들이 쫙 깔렸으니 절대 낯선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것” 등 다들 비슷비슷한 얘기들이었다. 려행증명서를 얻어 두만강을 건너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간부들에게 바칠 선물 목록을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촌형이 아무리 잘 산다지만, 최소 6천 위안은 넘게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그만한 돈을 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사촌형이 배포가 크기만을 바랄 뿐이다.

“간도 이민자 마음이 꼭 우리 같지 않았을까?”

림철씨는 두만강 다리를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면서 문득 일제 강점시기에 간도 땅으로 떠났던 수많은 이민자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때 사람들과 지금 자신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100년 전, 나라 잃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 한 자락 품고 두만강을 건너 세찬 바람이 부는 만주 벌판으로 나아갔으리라. 나라를 잃은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길이 없어 고향 땅을 등져야 하는 것이 꼭 그와 같아 보였다. 림철씨의 일행은 4명이었다. 화룡으로 가는 50대 아주머니 한 명과 도문 친척 집을 찾아가는 40대 아주머니, 장백현에 사촌형이 있다는 50대 남자 한 명, 그리고 연길시에 장사하러 나간다는 50대 남자 한 명이었다. 온성 사람 2명에 함경남도 함주와 함흥에서 온 2명은 똑같이 마른 낙지를 두 배낭씩 들고 있었다. 다들 려행증을 수속하는데 엄청난 돈과 인내심이 필요했었다고 했다. 5년 만에 려행증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2명은 3년 걸렸고, 나머지 한 명은 2년 걸렸다고 했다. 모두들 보름 안에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요즘 려행증을 받기가 더 까다로워졌는데, 모든 서류 조건을 갖춘다 해도, 기업소 책임자나 상급 간부의 보증이 없으면 발급을 못 받는다. 사사려행자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림철씨는 그들의 이야기를 참고해 엇비슷하게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다시 고향땅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먹고 살 길이 없고, 려행증을 받는데 진 빚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길에 고모할머니가 있어서 찾아가기는 해도 반겨줄지 의문이다. 친척집에 오래 있을 수는 없기에 그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라도 취직자리를 얻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림철씨는 “일제 때 처자식 손잡고,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한 마지기 땅이라도 찾아보려고 간도로 넘어 가던 사람들의 심정도 이와 같지 않았겠느냐”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경제활동

불안한 희천발전소

자강도 희천발전소의 시운전이 끝나고 본격 가동을 앞두고, 중앙당은 10년 이상 걸려야 한다던 발전소 건설을 단 3년 만에 끝냈다며 대대적인 포상과 축하를 했다. 희천발전소 설계부터 완공까지 고생한 일군들에게 노력영웅칭호 100여명을 포함해 김일성훈장, 김일성청년영예상, 공훈건설자 칭호, 국기훈장, 영예훈장 등 5만 7,872명을 표창하고, 건설노동자 7만 8,339명에게 기념메달을 수여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2010년 3월 5일 특별감사문까지 발표하면서,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건이며 사회주의의 대승리”라며 한껏 추켜올렸던 2.8비날론공장 개건 때의 포상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함흥시에서 10만 군중대회를 열며 축하했던 2.8비날론공장 개건식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74명이었다. 당시에도 파격적인 표창과 수여라고 했지만, 이번 희천발전소의 규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새 지도부의 격려와 기대가 클수록, 희천발전소 건설에 참가했던 당사자들은 불안할 뿐이다. 건설 시공에 참여했던 한 일군은 “원래 올해 1월 초부터 희천발전소 전기를 끌어다 평양에 24시간 전력 공급을 하려고 했다. 희천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작년 수해로 발전소 설비와 기자재들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액이 1천만 달러 이상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부랴부랴 해외일군들에게 돈을 차출해서 자재들을 새로 들여왔지만, 돈이 부족하니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완공을 했지만 아직까지 전압이 불안정하고 전력생산도 기대치만큼 나오지 않고 있다. 전력공급을 무리하게 하다보면 정전이 되거나 전압이 떨어진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계속 발생할 텐데, 뾰족한 대책은 없다. 설비를 새로 교체하려고 해도 막대한 자금이 들 것이고, 그러자면 교체 공사로 또 생산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야 웃고 있지만 사실 누구보다 속이 타는 건 우리들”이라며, 앞으로의 책임 문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평양시, 하루 20시간 전력공급

평양시는 최근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하루 전력공급 시간을 최대 20시간까지 늘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애도 기간 동안 하루에 1-2시간 공급하던 것에서 대폭 늘어난 것이다. 전력성의 한 간부는 “4월 15일 태양절을 기념해 모든 발전소를 가동해서라도 평양시 전력공급을 최우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다. 당초 계획은 수력, 화력발전소를 모두 가동해 24시간 전력공급을 실현하라는 지시였지만, 만가동은 어려워 최대 20시간 내외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했다. 태양절 기념행사를 맞이해 귀국한 해외대표부 일군들은 평양시의 전력사정이 크게 개선된 것에 놀라워했다. 한 일군은 “큰 개변이다. 모든 것이 다 전력문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전력문제가 이렇게 풀리는 모습을 보니, 이제 다 잘 풀릴 것 같다”고 크게 반가워했다. 하지만 모두 이런 기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국내 화력, 수력발전소의 생산량을 총동원해 전력공급을 하니 당장은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갈 지 장담할 수 없다는 시각이 많다.

■ 식량소식

황해도, “사람 죽는다 말 못해”

황해남도에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황해북도와 함경남도에서도 아사자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황해도와 함경남도 간부들은 연일 중앙당과 해외대표부에 “사람이 먹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좋으니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일부 간부들은 중국을 드나드는 일군들에게 벼나 옥수수종자를 몰래 들여와 달라는 부탁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얘기는 차마 못한다. 간혹 “고난의 강행군에서 고난의 초강행군을 넘어 이제는 경제 붕괴의 변두리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절망스러운 상황을 빗댈 뿐이다. 황해남도의 한 간부는 아사자 발생에 극구 함구하는 것은 국내외 안정을 최우선 기조로 삼고 있는 새 지도부에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