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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지회,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천안 독립기념관에 서다

세 활동가가 전하는 그날의 감동  [2026 화성 지역 역사기행]

글·사진 목영중·함윤희·이재향 / 화성지회

2026년 5월 10일, 화성지역 활동가와 회원들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우고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준비과정의 설렘부터 현장에서 함께 웃고 나누었던 순간, 그리고 역사를 통해 얻은 배움까지 세 분의 활동가님이 그날의 소중한 기억을 전해주셨습니다.

화성지회의 역사기행팀 
( 왼쪽부터 조민경님, 함윤희님, 이재향님, 김성년님, 목영중님 )

활동가 목영중 님 : 함께 만들어 더욱 뜻깊었던 역사기행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화성지회 역사기행에 함께했습니다. 참여할 때마다 새롭게 배워 가는 것이 많아 늘 설렙니다. 이번에 방문한 천안 독립기념관은 10여 년 전 찾은 적이 있었는데도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마치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프로그램 실무 총괄을 맡게 되어 처음에는 부담이 있었는데, 활동가님들과 함께 회의하며 프로그램을 하나씩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개인적인 일과 직장 업무가 겹쳐 세심하게 못 챙길 때도 활동가님들께서 먼저 나서서 채워 주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이 소감문을 쓰는 지금까지 모든 과정이 제게는 소중한 배움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는 참여자들에게 어떤 경험과 가치를 제공할지 고민했고, 답사를 통해서는 무엇을 담고 덜어낼지 판단하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전 답사 시간은 다 함께 소풍을 나온 듯 즐겁고 편안해 그 자체로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 따뜻한 기운 덕분이었는지, 행사 당일에는 회원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사이 어느새 하루가 풍성하게 마무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소감문을 작성하니 활동가님들과 회의하던 기억과 현장에서 함께 나누었던 추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사실 매번 역사기행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올해까지만 할까?’ 하는 지치는 마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활동가분들과 함께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면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지고, ‘내년에는 어떻게 더 잘해 볼까?’ 하는 마음이 다시 피어오릅니다.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꼈습니다. 현장 곳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주신 활동가님들 덕분에 역사기행이 더욱 알차고 의미 있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처럼 완성도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활동가님들 한 분 한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활동가 함윤희 님 :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기며 평화를 발원하다

화성지회, 천안 독립기념관에 서다

입구에 높이 솟아 있는 ‘겨레의 탑’을 지나 ‘태극기 한마당’에 들어서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반가움을 만끽한 뒤, 평화를 발원하는 5분 명상으로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역사기행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평화를 발원하는 5분 명상

명상을 마치고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둘러봤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가 너무도 많아 한 번의 관람으로는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사를 보며 가슴이 뭉클했고, 우리가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는 것도 모두 순국선열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생각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울려 퍼진 대한·민국·만세

전시관을 나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습니다. 돗자리를 펼치고 각자 싸 온 점심 도시락을 꺼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외식에 길들여지다 보니 도시락을 싸는 게 어색하고 귀찮기도 했는데, 직접 준비한 음식을 서로 권하며 먹다 보니 식사 시간 내내 웃음꽃이 피어났고, 분위기는 명랑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정다운 점심 식사

식사를 마친 후, 오늘 배운 내용을 점검하는 역사기행 퀴즈가 이어졌습니다. ‘대한’, ‘민국’, ‘만세’ 세 조로 나뉜 참가자들은 사회자님의 능숙한 진행에 따라 구호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퀴즈에 참여했습니다. 끝나고 나니 목이 쉰 활동가도 있을 만큼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우리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날이 1910년 8월 29일이었다는 사실과 폭행과 고문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가 만 16세였다는 깨알 같은 역사 이야기가 더해져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웃음꽃이 피어난 역사 퀴즈 시간

퀴즈로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10분간의 평화 명상을 통해 다시 차분해졌습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평화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자세히 알게 되어 뜻깊었다”, “지인 덕분에 이런 활동이 있는 걸 알게 돼서 너무 좋고 감사하다”, “명상과 퀴즈가 오늘 활동의 하이라이트였다”, “앞으로는 더 자주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겠다” 등의 소감을 나누며 자리를 마무리했습니다. 활동에 참석한 모두의 마음에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감사함,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남은 듯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활동가 이재향 님 : 새로이 알게 된 겨레와 독립의 역사

두 차례 전시 해설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 감동을 활동가들과 나눌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여러 해 역사를 배운 터라, 어쩌면 “아이, 그 정도는 다 알아, 한국 사람인데.”라는 안일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문을 받고 난 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굳어 있던 제 고정관념의 얼음을 파사삭 깨뜨리는 도끼 같았다고나 할까요? 너무 거창한 표현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 보시길 바라며, 그날 마주했던 질문들을 나눠 봅니다.

첫째, 전시장에 걸린 태극기의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둘째,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이었을까요, 물통 폭탄이었을까요?
셋째, 중국 국민당 정부는 왜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했을까요?
넷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왜 계속해서 회자되는 걸까요?


해설은 3관, 5관, 6관을 묶어 진행됐습니다. 3관 ‘겨레의 함성’에서는 3·1운동이 전 민족적 운동으로 번져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태극 문양과 사괘가 그려지고, 수놓아지고, 새겨진 다양한 태극기를 보았습니다. 1882년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해 이듬해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대한’이라는 국호와 함께 이어져 마침내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끈질긴 마음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보수하던 중 발견된 특이한 태극기도 있었습니다. 일장기 위에 태극 문양과 사괘를 덧대어 그린 것이지요. 지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그 시절에 그것을 지켜낸 지혜와 용기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독립선언서 구절이 오래도록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함께 듣고, 함께 새긴 시간

5관 ‘나라 되찾기’에서는 국내외 곳곳에서 펼쳐진 항일 무장투쟁을 살펴보았습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대표적인 승리였습니다. 열악한 형편 속에서도 지형을 활용해 맞선 독립군의 끈기와 투지를 보면, 이 전투들이 오래 회자되는 까닭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전시관에는 폭탄과 권총, 비수를 들고 맞선 열사들의 자취도 있었습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룬 영상과 모형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날 윤봉길 의사가 던진 것은 흔히 알려진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모양의 폭탄이었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한국 독립운동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연행되는 영상 속 윤봉길 의사를 보며, 자신의 안위보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담담히 잡혀가는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되새기며

마지막 6관 ‘새로운 나라’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우리 선조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두 딸 제시와 제니의 성장 과정을 기록한『제시의 일기』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당대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나아가 여성사까지 엿볼 수 있는 귀한 문헌이라고 합니다. 백일을 맞은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과 적어 둔 글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그들의 삶이 한층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공습을 피해 숨어 다니는 고된 여정 속에서도 아이들의 미래에 독립과 자유가 깃들기를 바랐을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니 가슴이 시큰해졌습니다.

『제시의 일기』에 담긴 독립의 기록

전시관을 돌아보며 깨닫게 된 것은 독립사를 빛낸 굵직한 이름들 외에도 ‘수많은 민중’이 광복의 그날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안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즐겨 인용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평화와 자유, 미래를 위해 어떤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며, 이 글귀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눈 덮인 들판을 지나갈 때 / 함부로 길을 걷지 마라. / 오늘 내가 지나간 길은 / 언젠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의 절구)

815개의 태극기 아래에서 – 수많은 민중의 희생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