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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03호

■ 시선집중

유명 옷 수선사, 잘 팔 땐 하루 2만원 수입

청진시 포항구역 수남시장에는 중고옷을 전문적으로 파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중국에서 들어온 중고옷들을 파는데 간혹 한국산 옷들도 끼어있다. 가장 인기 있는 옷은 아무래도 질이 좋고 옷 모양도 예쁜 한국산이다. 중국옷은 중국 사람들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것들이라 북한 주민들에게 딱 맞는 경우가 별로 없고, 옷 솔기가 뜯어지거나 남루한 옷들이 많다. 그래서 손재간이 있는 여성들은 집에서 재봉틀을 가지고 옷을 수선하며 생계를 잇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돈주들 밑에서 날품팔이처럼 단순 바느질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봉자(가명)씨처럼 과감하게 수선해서 아예 새로운 옷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수선사라기보다는 재단사에 가깝다. 몸에 맞추어 옷을 새로 고쳐주고, 때로는 디자인까지 바꾸어주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는 물건보다 오히려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처음에는 시장에 주로 내다 팔았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직접 찾아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이 늘어난 것이다. 장씨도 처음에는 단순히 바느질만 했었다. 재단사로 탈바꿈한데에는 북한 정부의 국경통제가 한 몫 했다. “중고 옷은 주로 회령이나 무산에서 들어온다. 2년 전만 해도 사사려행자들이 세관을 통해 중고옷을 많이 넘겨 와서 시장에 내다팔아, 장사꾼들 벌이가 제법 좋았다. 그저 터진 옷 꿰매주는 정도의 일만 했을 뿐이라, 돈도 별로 못 벌었는데, 당시에 하루에 쌀 1kg 벌면 많이 벌었다. 그런데 국경 단속이 심해지고, 세관에서 중고 옷을 못 들어오게 하면서부터 살 길이 열렸다. 물론 밀수는 여전하지만 줄을 못 대는 사람들은 국내에서 중고 옷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옷을 모으다나니 상태가 심하게 나쁜 옷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고지식하게 중국산 중고 옷 꿰매듯이 했는데 하다 보니 그 정도로 안 되는 옷들이 많았다. 가위로 잘라낼 건 잘라내고, 새로운 천을 덧붙이고 이리저리 하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나에게 중고 옷들을 갖다 주던 여자의 옷부터 그렇게 해주었는데 자기 몸에 꼭 맞는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좀 뜸을 들이더니 “뭐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사실 남조선 옷을 많이 모방한다. 재질은 중국산이어도 모양만이라도 남조선 것들을 본 따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귀띔해주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한다고 했다. 단지 장씨의 솜씨가 원래 출중하다보니 단골들이 많아지고,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하루에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느냐는 질문에는 망설이더니 “제일 잘 팔았을 때가 2만 원? 매일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은 하루에 옷 한 벌도 못 팔 때도 많다”고 했다. 마침 중고 옷을 수집해서 일감을 맡기러 온 여자에게 장씨 옷의 인기 비결을 물었다. “(장씨가) 손재간을 부려서 재봉기로 가공하는데, 새로운 형식으로 멋있게 재가공해준다. 우리 청진에서 멋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옷 모양새를 주문한다. 나는 대량으로 주문하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하지만, 멋내기 좋아하는 여자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한다. 중국산 새 옷을 사자니 비싸서 못 입고, 남조선 것은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하니 중고옷들 중에 질이 좋은 것을 선호하는데 이왕이면 자기 몸에 맞고 보기에도 좋은 것을 입고 싶어하니까 다들 장씨에게 가져오는 거다. 그래서 멋 좀 낸다하는 여자들은 모두 장씨 아주머니를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장씨의 명성을 확인해주었다.

옷 장사 하루 벌이 1,500원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 남향 1동에 사는 정순옥(가명)씨는 수남시장에 옷을 내다 팔며 하루벌이를 하고 있다. 대개 중국에서 중고 옷을 들여오는 옷장사가 많지만, 정씨는 개인들이 집에서 만든 옷을 받아 판다. 중국에서 천을 대량으로 들여와 30-40명의 바느질 삯벌이를 고용해 옷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돈주들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옷을 받아 판다. 정씨는 작년부터 장사가 점점 안 되더니 요즘엔 벌이가 더 시원치 않다고 했다. “하루 잘 팔아봐야 1,500원이고, 어떤 날에는 1,000원도 못 벌 때가 있다. 장세까지 바치고 나면 600원도 안 돼 옥수수 1kg도 못 사는 날도 있다. 애들 둘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한 달 평균 2천원은 학교에 바치는 것 같다. 다음 달부터는 학교도 못 내보낼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정을 유지해나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잡화류 장사꾼, 하루 1,800원도 못 벌어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읍에 사는 리영옥(가명)씨는 화교에게서 중국산 잡화를 넘겨받아 시장에 소매로 파는 일을 하고 있다. 리씨는 하루종일 잡화를 팔아야 1,800원도 못 벌 때가 많다고 했다. 세대주가 고무산 시멘트공장에 출근하고 있지만 월급과 배급이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되면서 세대주에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루 내내 목 아프게 소리치며 잡화류를 부지런히 팔아봤자, 1,800원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리씨는 “아이들 학교에서 내라는 과제에 인민반과 직장, 녀맹에서 사회 부담이라고 거둬들이는 게 너무 많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하루 2,000원 넘기기가 힘든데 과제들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가 없다. 장사 밑천마저 떨어질 지경이다. 이대로 가면 5월이 가기 전에 장사 밑천을 다 말아먹을 것 같다. 이 장사도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물고기 장사 10년, 하루 옥수수 1kg도 못 사

강원도 원산시 명석동에 사는 김미화(가명)씨는 10년 넘게 물고기(생선) 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2000년도부터 물고기 장사를 시작했는데, 화폐개혁 전만 해도 그런대로 하루 벌이하면 쌀도 사먹고 달걀이나 두부 같은 부식물도 사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냐는 물음에 김씨는 “보면 모르겠냐”고 퉁을 놓았다. 뻔한 걸 왜 묻느냐는 말투다. “친구가 물고기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요즘 벌이가 어떤지 알아야 권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라고 하니 그제야 “하루 옥수수 1kg도 못 번다. 세대주(남편)가 굶고 출근하는 날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되는 것 같다. 우리 세대주가 고지식한 사람이어서 직장에서 출근하라고 강요하면 굶더라도 하루 종일 나가 있다. 가정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딸이 둘 있는데 학교에 안 보낸다. 물고기를 나르고 엄마 없을 때 물건을 지키라고 시장에 데려간다. 아직 열두 살도 안 된 애들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안 그러면 어찌 살겠나. 선생님들이 귀찮게 자꾸 찾아와서 애들 학교 내보내라 마라 하는데 답답하다. 부모가 돼서 안 가르치고 싶어서 안 보내나. 하루 종일 시장에 나와 있어도 손에 쥐어지는 게 없는데, 애들은 어떻게 먹일 것이며, 옷은 어떻게 입힐 것이며, 학교에서 내라는 과제들은 어떻게 해가겠는가. 돈이 없으니 물고기도 조금 받아오는데, 말이 물고기 장사지 1년 동안 특별한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아니면 감히 내가 팔던 물고기도 못 먹어 본다”고 처음과 달리 신세한탄을 오래도록 늘어놓았다. 물고기 장사로 10년 넘게 잘 먹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생활이 급락한 것이 원통하다는 얘기도 했다. “나라에서 백성을 죽이려고 하는지 살리려고 하는지 진짜 지금도 알 수가 없다”며 화폐개혁의 여파가 오래가고 있다고 했다.

10년째 두부밥 장사, 하루 수익 2천원 미만

강원도 원산시 원산역 앞에는 음식을 파는 아주머니들로 늘 붐빈다. 최선희(가명)씨는 원산역에서 10년 동안 두부 밥을 팔고 있다. 시기에 따라 만두밥, 빵, 떡도 가지고 나올 때가 있지만 두부밥을 팔 때가 많다. 두부를 얇게 저며 튀기고 그 가운데에 밥을 넣은 것을 두부밥이라고 하는데, 고추장 양념을 위에다 살짝 발라준다. 10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기차여행을 하는데 미처 도중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손님들이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장사 하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생겨서 경쟁이 치열하다. 하루 100개에서 150개 정도를 만들어 나오는데, 요즘엔 하루 수익이 2천원도 안 될 때가 많다. 장사가 안 되다보니 두부피는 점점 얇아지고, 밥량도 줄고 고추장양념 바르는 것마저도 인색해졌다. 음식의 질이 떨어지니, 자연스레 찾는 손님은 더 줄어만 갔다. 겨울에는 안 팔리는 음식을 보관하기가 그나마 쉬웠는데, 날이 따뜻해지면서 음식이 상할까 걱정이다. 최씨는 “지금 같아서는 장사가 안 되어 먹고 살기가 너무 바쁘다(힘들다). 나이라도 젊었으면 중국에 팔려가기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사는 게 정말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일본 중고 자전거 장사 12년, 살기 더 점점 더 어려워

강원도 원산시 갈마동에 사는 최명일(가명)씨는 일본 중고 자전거 장사만 12년째 하고 있다. 장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새 것처럼 깨끗이 정비한 자전거를 시장에 내다팔았다. 기름칠도 새로 하고, 제동장치를 몇 번이고 점검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최씨의 기계 다루는 솜씨는 직장 동료들도 인정했다. 아무리 녹슬고 낡아빠진 기계라도 최씨 손만 거치면 신기하게 새 것처럼 변한다고 모두들 칭찬이 자자했다. 일본 배가 원산항에 들어올 때마다 일감이 무궁무진 쏟아졌고 쉴 틈 없이 일했다.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무뚝뚝한 최씨와 달리 애교가 많은 그의 아내가 도맡았다. 두 부부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입쌀밥은 떨어뜨리지 않고 먹었고, 어린 세 자녀 교육도 별 걱정 없이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 등 일본과 굵직굵직한 외교 현안들이 터졌다. 2006년 10월,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이 금지된 이후, 대일 교역의 주요 통로였던 원산항이 직격탄을 맞았다. 그동안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박에서 일하던 처남 덕분에 일본 중고 자전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최씨도 당장 일거리가 급격히 줄었다. 그나마 러시아와 캄보디아 등의 선박을 통해 일본 중고물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처남이 몰래 물량을 대주던 시절에 비하면 살기가 팍팍해졌다. 화폐개혁 때 그동안 모아두었던 조선 돈을 모두 날려버렸지만 다행히 위안화로 바꾸어둔 돈이 좀 있어 작년 봄부터 중고 자전거 장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자전거 1대를 손질하려면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 대개 1대에 2만원 받고 파는데 교체한 부품값 등을 제하면 손에 쥐어지는 돈은 얼마 안 된다. 요즘엔 일본산 중고자전거를 받으면 일단 모두 해체한다. 쓸만한 부품들을 따로 챙겨두고, 대신 시장에서 싼 중국산 부품을 사 끼워 넣는다. 일본산 부품들은 중국산보다 2-3배 비싸게 팔리므로, 시장에 내다판다. 이러한 방식으로 최씨가 새로 정비한 자전거는 겉만 일본산이고, 사실 중국산이다. 아무래도 제 짝이 아닌 부품이 끼워지다 보니 자전거가 오래 갈 리 없고, 손님들의 항의가 많아진 것은 물론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내 량심을 속여 가며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식구들 입에 풀칠하자니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만 량심을 지킨다고 해서 누가 식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요즘에는 다들 이렇게 눈속임으로 산다”는 것이 최씨의 항변이다.

“지금 북한의 도시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식량 부족 상황에서 도시의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몇몇 주민들을 인터뷰한 결과, 도시 주민들은 화폐교환조치로 타격을 받은 뒤 그 여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들이 도시의 주민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잘못된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다음은 인터뷰한 사례들 중에서 생계방법을 중심으로 선별한 내용들이다. 북한 주민들의 생계 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 경제활동

유명 옷 수선사, 잘 팔 땐 하루 2만원 수입

청진시 포항구역 수남시장에는 중고옷을 전문적으로 파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중국에서 들어온 중고옷들을 파는데 간혹 한국산 옷들도 끼어있다. 가장 인기 있는 옷은 아무래도 질이 좋고 옷 모양도 예쁜 한국산이다. 중국옷은 중국 사람들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것들이라 북한 주민들에게 딱 맞는 경우가 별로 없고, 옷 솔기가 뜯어지거나 남루한 옷들이 많다. 그래서 손재간이 있는 여성들은 집에서 재봉틀을 가지고 옷을 수선하며 생계를 잇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돈주들 밑에서 날품팔이처럼 단순 바느질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봉자(가명)씨처럼 과감하게 수선해서 아예 새로운 옷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수선사라기보다는 재단사에 가깝다. 몸에 맞추어 옷을 새로 고쳐주고, 때로는 디자인까지 바꾸어주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는 물건보다 오히려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처음에는 시장에 주로 내다 팔았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직접 찾아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이 늘어난 것이다. 장씨도 처음에는 단순히 바느질만 했었다. 재단사로 탈바꿈한데에는 북한 정부의 국경통제가 한 몫 했다. “중고 옷은 주로 회령이나 무산에서 들어온다. 2년 전만 해도 사사려행자들이 세관을 통해 중고옷을 많이 넘겨 와서 시장에 내다팔아, 장사꾼들 벌이가 제법 좋았다. 그저 터진 옷 꿰매주는 정도의 일만 했을 뿐이라, 돈도 별로 못 벌었는데, 당시에 하루에 쌀 1kg 벌면 많이 벌었다. 그런데 국경 단속이 심해지고, 세관에서 중고 옷을 못 들어오게 하면서부터 살 길이 열렸다. 물론 밀수는 여전하지만 줄을 못 대는 사람들은 국내에서 중고 옷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옷을 모으다나니 상태가 심하게 나쁜 옷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고지식하게 중국산 중고 옷 꿰매듯이 했는데 하다 보니 그 정도로 안 되는 옷들이 많았다. 가위로 잘라낼 건 잘라내고, 새로운 천을 덧붙이고 이리저리 하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나에게 중고 옷들을 갖다 주던 여자의 옷부터 그렇게 해주었는데 자기 몸에 꼭 맞는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좀 뜸을 들이더니 “뭐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사실 남조선 옷을 많이 모방한다. 재질은 중국산이어도 모양만이라도 남조선 것들을 본 따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귀띔해주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한다고 했다. 단지 장씨의 솜씨가 원래 출중하다보니 단골들이 많아지고,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하루에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느냐는 질문에는 망설이더니 “제일 잘 팔았을 때가 2만 원? 매일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은 하루에 옷 한 벌도 못 팔 때도 많다”고 했다. 마침 중고 옷을 수집해서 일감을 맡기러 온 여자에게 장씨 옷의 인기 비결을 물었다. “(장씨가) 손재간을 부려서 재봉기로 가공하는데, 새로운 형식으로 멋있게 재가공해준다. 우리 청진에서 멋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옷 모양새를 주문한다. 나는 대량으로 주문하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하지만, 멋내기 좋아하는 여자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한다. 중국산 새 옷을 사자니 비싸서 못 입고, 남조선 것은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하니 중고옷들 중에 질이 좋은 것을 선호하는데 이왕이면 자기 몸에 맞고 보기에도 좋은 것을 입고 싶어하니까 다들 장씨에게 가져오는 거다. 그래서 멋 좀 낸다하는 여자들은 모두 장씨 아주머니를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장씨의 명성을 확인해주었다.

옷 장사 하루 벌이 1,500원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 남향 1동에 사는 정순옥(가명)씨는 수남시장에 옷을 내다 팔며 하루벌이를 하고 있다. 대개 중국에서 중고 옷을 들여오는 옷장사가 많지만, 정씨는 개인들이 집에서 만든 옷을 받아 판다. 중국에서 천을 대량으로 들여와 30-40명의 바느질 삯벌이를 고용해 옷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돈주들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옷을 받아 판다. 정씨는 작년부터 장사가 점점 안 되더니 요즘엔 벌이가 더 시원치 않다고 했다. “하루 잘 팔아봐야 1,500원이고, 어떤 날에는 1,000원도 못 벌 때가 있다. 장세까지 바치고 나면 600원도 안 돼 옥수수 1kg도 못 사는 날도 있다. 애들 둘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한 달 평균 2천원은 학교에 바치는 것 같다. 다음 달부터는 학교도 못 내보낼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정을 유지해나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잡화류 장사꾼, 하루 1,800원도 못 벌어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읍에 사는 리영옥(가명)씨는 화교에게서 중국산 잡화를 넘겨받아 시장에 소매로 파는 일을 하고 있다. 리씨는 하루종일 잡화를 팔아야 1,800원도 못 벌 때가 많다고 했다. 세대주가 고무산 시멘트공장에 출근하고 있지만 월급과 배급이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되면서 세대주에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하루 내내 목 아프게 소리치며 잡화류를 부지런히 팔아봤자, 1,800원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리씨는 “아이들 학교에서 내라는 과제에 인민반과 직장, 녀맹에서 사회 부담이라고 거둬들이는 게 너무 많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하루 2,000원 넘기기가 힘든데 과제들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가 없다. 장사 밑천마저 떨어질 지경이다. 이대로 가면 5월이 가기 전에 장사 밑천을 다 말아먹을 것 같다. 이 장사도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물고기 장사 10년, 하루 옥수수 1kg도 못 사

강원도 원산시 명석동에 사는 김미화(가명)씨는 10년 넘게 물고기(생선) 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2000년도부터 물고기 장사를 시작했는데, 화폐개혁 전만 해도 그런대로 하루 벌이하면 쌀도 사먹고 달걀이나 두부 같은 부식물도 사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냐는 물음에 김씨는 “보면 모르겠냐”고 퉁을 놓았다. 뻔한 걸 왜 묻느냐는 말투다. “친구가 물고기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요즘 벌이가 어떤지 알아야 권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라고 하니 그제야 “하루 옥수수 1kg도 못 번다. 세대주(남편)가 굶고 출근하는 날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되는 것 같다. 우리 세대주가 고지식한 사람이어서 직장에서 출근하라고 강요하면 굶더라도 하루 종일 나가 있다. 가정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딸이 둘 있는데 학교에 안 보낸다. 물고기를 나르고 엄마 없을 때 물건을 지키라고 시장에 데려간다. 아직 열두 살도 안 된 애들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안 그러면 어찌 살겠나. 선생님들이 귀찮게 자꾸 찾아와서 애들 학교 내보내라 마라 하는데 답답하다. 부모가 돼서 안 가르치고 싶어서 안 보내나. 하루 종일 시장에 나와 있어도 손에 쥐어지는 게 없는데, 애들은 어떻게 먹일 것이며, 옷은 어떻게 입힐 것이며, 학교에서 내라는 과제들은 어떻게 해가겠는가. 돈이 없으니 물고기도 조금 받아오는데, 말이 물고기 장사지 1년 동안 특별한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아니면 감히 내가 팔던 물고기도 못 먹어 본다”고 처음과 달리 신세한탄을 오래도록 늘어놓았다. 물고기 장사로 10년 넘게 잘 먹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생활이 급락한 것이 원통하다는 얘기도 했다. “나라에서 백성을 죽이려고 하는지 살리려고 하는지 진짜 지금도 알 수가 없다”며 화폐개혁의 여파가 오래가고 있다고 했다.

10년째 두부밥 장사, 하루 수익 2천원 미만

강원도 원산시 원산역 앞에는 음식을 파는 아주머니들로 늘 붐빈다. 최선희(가명)씨는 원산역에서 10년 동안 두부 밥을 팔고 있다. 시기에 따라 만두밥, 빵, 떡도 가지고 나올 때가 있지만 두부밥을 팔 때가 많다. 두부를 얇게 저며 튀기고 그 가운데에 밥을 넣은 것을 두부밥이라고 하는데, 고추장 양념을 위에다 살짝 발라준다. 10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기차여행을 하는데 미처 도중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손님들이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장사 하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생겨서 경쟁이 치열하다. 하루 100개에서 150개 정도를 만들어 나오는데, 요즘엔 하루 수익이 2천원도 안 될 때가 많다. 장사가 안 되다보니 두부피는 점점 얇아지고, 밥량도 줄고 고추장양념 바르는 것마저도 인색해졌다. 음식의 질이 떨어지니, 자연스레 찾는 손님은 더 줄어만 갔다. 겨울에는 안 팔리는 음식을 보관하기가 그나마 쉬웠는데, 날이 따뜻해지면서 음식이 상할까 걱정이다. 최씨는 “지금 같아서는 장사가 안 되어 먹고 살기가 너무 바쁘다(힘들다). 나이라도 젊었으면 중국에 팔려가기라도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사는 게 정말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일본 중고 자전거 장사 12년, 살기 더 점점 더 어려워

강원도 원산시 갈마동에 사는 최명일(가명)씨는 일본 중고 자전거 장사만 12년째 하고 있다. 장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새 것처럼 깨끗이 정비한 자전거를 시장에 내다팔았다. 기름칠도 새로 하고, 제동장치를 몇 번이고 점검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최씨의 기계 다루는 솜씨는 직장 동료들도 인정했다. 아무리 녹슬고 낡아빠진 기계라도 최씨 손만 거치면 신기하게 새 것처럼 변한다고 모두들 칭찬이 자자했다. 일본 배가 원산항에 들어올 때마다 일감이 무궁무진 쏟아졌고 쉴 틈 없이 일했다.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무뚝뚝한 최씨와 달리 애교가 많은 그의 아내가 도맡았다. 두 부부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입쌀밥은 떨어뜨리지 않고 먹었고, 어린 세 자녀 교육도 별 걱정 없이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002년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이어 2006년 북한의 핵실험 등 일본과 굵직굵직한 외교 현안들이 터졌다. 2006년 10월,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이 금지된 이후, 대일 교역의 주요 통로였던 원산항이 직격탄을 맞았다. 그동안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박에서 일하던 처남 덕분에 일본 중고 자전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최씨도 당장 일거리가 급격히 줄었다. 그나마 러시아와 캄보디아 등의 선박을 통해 일본 중고물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처남이 몰래 물량을 대주던 시절에 비하면 살기가 팍팍해졌다. 화폐개혁 때 그동안 모아두었던 조선 돈을 모두 날려버렸지만 다행히 위안화로 바꾸어둔 돈이 좀 있어 작년 봄부터 중고 자전거 장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자전거 1대를 손질하려면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 대개 1대에 2만원 받고 파는데 교체한 부품값 등을 제하면 손에 쥐어지는 돈은 얼마 안 된다. 요즘엔 일본산 중고자전거를 받으면 일단 모두 해체한다. 쓸만한 부품들을 따로 챙겨두고, 대신 시장에서 싼 중국산 부품을 사 끼워 넣는다. 일본산 부품들은 중국산보다 2-3배 비싸게 팔리므로, 시장에 내다판다. 이러한 방식으로 최씨가 새로 정비한 자전거는 겉만 일본산이고, 사실 중국산이다. 아무래도 제 짝이 아닌 부품이 끼워지다 보니 자전거가 오래 갈 리 없고, 손님들의 항의가 많아진 것은 물론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내 량심을 속여 가며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식구들 입에 풀칠하자니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나만 량심을 지킨다고 해서 누가 식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요즘에는 다들 이렇게 눈속임으로 산다”는 것이 최씨의 항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