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봉사로서 병역의무를 이행하고픈

어느 젊은이의 기록

오태양

-김해수해지역복구 봉사활동 둘째날의 기록-

2002. 8. 26

눈을 뜨니 오전 7시가 다 되어간다. 매일 일어나는 시각보다 한참을 늦었다. 어제밤 같은 교실 숙소를 쓰는 중학생 기남이가 새벽녘까지 TV보는 소리, 모기소리에 잠을 설쳤던 게다. ‘그래도 이런 곳까지 와서 늦잠을 자다니..’하는 자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잡념을 떨치고자 명상하고 가볍게 몸을 푸니 한결 좋다. 아침 해가 다소 따가운 걸 보니 오늘 더위를 짐작할 만 하다. 마을은 아직 기지개를 켜지 않았는지 한적하고 조용한 편이다. 어제 급식소에서 받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려 했는데, 마침 1층에서 식사하고 계시던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굳이 식사를 권하신다. 찬밥에 김치, 김 뿐인데도 꿀맛이다.

아침나절에는 어제 못다 본 마을피해상황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로 했다. 어제 면사무소 근처의 집들과 논밭들만 살펴보았는데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더 지대가 낮은 마을 안쪽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래된 가옥들은 벽에 금이 간 것은 물론이고, 아예 담이 붕괴되거나 집이 통째로 붕괴된 곳도 보인다. 집집마다 온통 진흙창이 되어 못 쓰게 된 집안살림들이 쓰레기 더미를 이루고 있다. 마치 폐가처럼 되어 뼈대만 앙상한 집들은 이 곳 주민들의 한탄스런 마음같고, 쓰레기더미들은 그네들의 한숨과 절망의 토사물처럼도 느껴져 안쓰러움이 더하다.

집은 보수하면 된다지만 논밭은 그야말로 초토화다. 처음 논밭을 보았을 때의 당혹감이 논길을 따라 걷는 내내 계속된다. 사방 1km 눈에 보이는 모든 전답들은 온통 황토빛. 초록의 빛깔이란 멀리 보이는 동네 낮은 구릉 말고는 없다. 이 곳이 열나흘을 꼬박 빗물에, 강물에 잠겨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필경 추수 끝난 황토빛 들녘으로 착각했으리라. 나도 그랬으니 말이다. 가을의 풍성한 들녘이 ‘황금빛 바다’를 이룬다 하여 ‘김해(金海)’라 이름 붙여졌다던 지명의 유래가 무색할 정도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주변 공단의 기름까지 논으로 흘러들어 토지가 심하게 오염된 곳은 올해 농사는 물론이고 내년 농사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라 한다. 어디 쓰러지고 썩어 문드러진 것이 볏단뿐이겠는가… 자신의 목숨줄의 일부와도 같은 그것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엎어질 때 이곳 농민들의 마음도 그랬으리라. 포도밭 앞에서 망연자실 서 계시는 할아버님의 하소연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벼농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7년을 키워 온 포도나무 수백그루가 죄다 죽어버린 사연을 서울에서 봉사하러 왔다하니 내게 하소연하시는데, 나는 그저 ‘할아버지 그래!

도 힘내셔서 다시 시작하셔야죠’ 하는 위로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전화번호를 적어드리고, ‘일손 필요하실 때 꼭 연락하시라’는 말 남기고 자리를 뜨는데, 할아버지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바라보신다. 목덜미가 자꾸 찡 하니 저려온다.

논길을 따라, 도로를 따라 2시간 남짓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진흙빛뿐이다. 집들도, 논밭도, 집 잃은 소들이며 오고가는 차들까지. 심지어는 마주치는 마을분들의 얼굴빛마저도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 중앙에 있는 구릉에 올라 보니 한림면의 마을피해가 더욱 확연히 펼쳐진다. 한림면과 이웃면 경계도로를 따라 한편은 짙은 황토빛이, 한편은 짙은 초록색이 선연히 대비되어 보이는 것이다. 50년 반평생을 이 곳에 살아오면서도 이번과 같은 일은 처음이라시며, 아직도 꿈만 같다시던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이 더욱 아리게 다가오기도 한다. 마을 주민분들이 삼삼오오 모이시기만 하면 분통을 터뜨리시며 말씀하시는 이번 마을침수해의 원인이 사상최대의 집중폭우에 있든, 마을 외곽 강둑의 부실공사에 있든, 행정당국의 늦장 대책에 있든 수마가 낸 상처가 쉽게 아물 것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오전에 대략적인 피해상황을 살펴보고, 일단은 일손이 더욱 절실히, 시급히 필요한 곳이 면사무소 근처의 주택가보다는 조금 떨어진 농가라는 판단을 내렸다. 읍내는 외부자원봉사 인력도 붐빌뿐더러, 복구를 위한 장비들도 어느정도 갖추어져 있는데 반해, 마을 외곽 특히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계시는 가옥이나 농지는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앞으로 복구활동을 주로 외곽에 나가 농가를 중심으로 일을 도와드리기로 원칙을 세웠다.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면사무소 바로 뒷편 기계설비간이공장이 무척이나 붐빈다. 가서 일손이 필요하신지 여쭈어 보았더니, 바로 일거리를 주시길래 오후내내 그곳에서 일을 했다. 기계설비공장이라고는 하지만 남아있는 앙상한 철근골조가 서로를 의지한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정도이다. 아예 건물을 다 헐고, 다시 지어야 하신다고 하신다. 백만원씩 하는 설비기계들이 모두 녹슬고 고장이 나는 바람에 피해규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시며 한숨을 내 쉬는 아저씨, 아주머니… 그 안타까운 마음 담아 부지런히 철근에 끼여있는 진흙과 녹물들을 박박 물로 씻고 닦아낸다. 아주머니 아저씨?

湧?빛바랜 마음도 이렇게 다시 삶에 대한 희망빛으로 새로워질 수 있겠지…?

해 떨어지는 시간. 이 곳 한림면의 해거름은 퍽이나 아름답다. 지는 해가 유난히 둥글고 붉어 보이는 것은 한숨과 절망 속에서도 억척같이 다시 일어서는 민초들의 생명력을 믿는 내안의 뜨거운 바램 때문일까?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설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