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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지(강화도 역사기행 1편)

부천 활동가 박월해

 통일을 위해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삼백배, 오백배 외의 통일을 염원하는 정진 외에도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부천지역 역사기행의 출발점은 흥미롭습니다. 부천은 한국 근대사의 시작이었던 인천개항지와 인접해 있으며, 섬 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강화도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3년 가을에는 역사기행을 실천하기 위해 강희석님과 부천지역대표를 포함한 6명이 모여 ‘부천지역 역사기행 1차 준비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6시에 정기적인 준비회의를 진행하여 23년 10월 3일까지 총 8회차의 준비회의를 거쳐 대망의 부천지역 1차 역사기행이 23년 10월 14일 06:30에 강화도로 출발했습니다.

 강화도의 역사 유적지를 하루만에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은 역사적 장소에서 시대의 사건을 음미하며 진행되어야 하는 통일활동가들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대형버스를 이용하여 40명이 넘는 인원을 고려할 때에는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에 강화도 동쪽의 해협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며 4개의 역사적 장소를 기행하는 일정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부천에서 강화도까지의 이동시간은 보통 1시간 정도이지만, 휴일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보다 약 30분 일찍 첫 기행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첫 기행지는 강화도 동북쪽 해안에 위치한 연미정이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강화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강희석님과 박월해님이 2곳씩 나누어 역사 안내를 진행했습니다. 강화도라는 이름은 ‘가비고지’에서 유래되었는데, 가비는 ‘가운데’, 고지는 ‘곶’을 뜻하는 한국말입니다. 곶은 바다를 향해 돌출한 지형을 의미하므로, 가비고지는 결국 ‘가운데의 곶’이라는 뜻입니다. 이 섬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바다와 합류하는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강화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차내에서 강화도의 소개와 회원들의 첫 마음을 공유하고, 대형버스는 연미정 맞은 편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연미정>

 연미정은 정자의 이름이며, 언덕 위에 위치하여 주변을 조망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연미정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면, 동남쪽으로 강화도와 김포를 구분하는 강화해협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져 예성강을 이루는 일명 ‘조강(祖江)’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바로 이 조강 건너편으로 북한이 훤히 보이지만, 우리가 연미정을 찾은 그 날은 날씨가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보이던 예성강 어귀가 어디인지 명확히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최근 남북관계와 국제정세를 연상케 했습니다.

 또한 조강이 시작되는 김포 북쪽 한 가운데에는 유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습니다. 이 유도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물줄기가 한강이었는데, 직접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에서 강화도가 버티고 있어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 모양이 제비 꼬리를 연상시켜서 연미(燕尾, 제비꼬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중종 때 강화도 사람으로서 삼포왜란을 진압한 선봉장군 황형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나라에서 이곳 연미정 정자와 주변 땅을 하사했습니다. 연미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황형장군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연미정 양쪽으로 500년 된 느티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었지만, 2019년 가을 태풍 링링이 강타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나무가 부러져 현재는 한쪽 나무만이 위엄을 뽐내고 있습니다.

 조선 인조 때 후금의 침략으로 강화도는 다시 국가 방어의 최후 전략지가 되었습니다. 정묘호란(1627년)이 발발하자 인조는 강화도에서 적들의 동향을 살피고 후금이 전쟁을 계속할 의향이 없음을 파악하고 형제 관계를 맺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연미정이었습니다.

<월곶진>

 원래 연미정은 지금과 같은 군사 시설이 아니었지만, 정묘호란이 끝난 후 인조가 강화도의 국방상 중요성을 실감하고 요새화 전략에 착수하여 월곶진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는 연미정이 월곶진 내부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폐기하였습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후금은 오랑캐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명나라를 섬길 나라로 삼는다는 것과 배금친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이 침입하자 강화도에 숨어야 했습니다. 정묘호란이 종결된 이후 청나라는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며, 결과적으로 강화도는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했습니다.

<강화남문>

 이곳 연미정에서 모임별 또는 개인별로 사진촬영을 마치고 두 번째 기행지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승차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행지는 강화남문이었습니다. 강화남문은 강화읍 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차 사정으로 장시간 머물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행히 휴일이라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역사기행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강도남문(江都南門)’ 남문 정면 2층 문루 중앙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입니다. 1955년 무너진 문루를 1975년 복원하면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글씨라고 합니다. 문루 반대편 안쪽에는 ‘안파루(晏波樓)’라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강화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난리 때마다 나라 님이 강화도로 달려왔으니 백성들의 바람이 곧 강화 바다의 안정이 아니었을까요? 이곳 남문은 병자호란(1636) 때 김상용 선생이 문루에 폭약을 쌓아 놓고 폭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청나라 군에게 항복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김상용 선생은 영화 남한산성에서 주화파 최명길과 대립한 주전파 김상헌의 친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충절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230년이 지나 조선은 병인양요(1866)를 겪게 되고, 프랑스군이 이곳 남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와 강화읍을 마음대로 약탈했으니 남문은 외적들에 의해 두 번 부서지고 열렸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 박탈이라는 음모를 감추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 장소인 연무당으로 이동하면서 대표단과 중무장한 군인 400명을 이끌고 이곳 남문을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강화남문은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비통한 장면을 여러 번 묵묵히 지켜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슬픈 역사 속에서 미래를 배우지 못하는 것인가요? 왜 역사를 잊고 비통함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역사를 몰라서가 아닐까요?

 남문 역사 기행을 마무리할 때쯤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급히 버스에 올라 세 번째 기행지인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강화남문에서 전등사까지 25분 소요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차내에서 역사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이곳 강화남문에서 불과 300m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현재 행정지명으로 관청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는 살창이 또는 살챙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유래는 이러하다고 합니다. 고려 말 요동정벌에 반기를 들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고려 33대 창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왕은 자신들이 폐위시킨 왕의 아들이었고 그들이 원하던 왕도 아니었기에 폐위시킬 명분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명분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 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을 옹립함)이었습니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왕 또한 신돈의 손자에 해당하니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창왕이 폐위되었고 평민으로 강등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어 곧 살해되었는데 나이 겨우 10살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창왕이 살해된 곳이라하여 살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광해군 때 이곳은 8살이었던 영창대군의 유배지였습니다. 영창대군을 방에 감금하고 음식물을 넣어 주지않고 온돌에 계속 불을 지폈다고 합니다. 배고픔과 고온에 시달리던 영창대군은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 사연을 들은 이들은 모두 영창대군을 불쌍히 여겼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조정은 그 일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영창대군의 일을 말하는 백성들은 모두 관에 끌려 가서 치도곤을 당했다고 합니다. 강화도는 외세 침략 뿐 아니라 나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륜조차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무지한 속계 중생의 적나라한 모습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역사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10년 사이 양대 전쟁 후 우리 백성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가볍게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오랑캐 ‘호(胡)’자로 시작하는 호떡, 호주머니, 호래자식 등 이런 단어들은 호란 이전에는 없었던 문화였으나 두 번의 전쟁으로 우리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 외래 문화임을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사이 버스는 전등사 남문 주차장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강화남문에서 시작된 비는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200m 정도 완만한 오르막 길을 오르다 보면 남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정족산성의 남문은 1970년에 복원되었는데 문의 이름은 종해루라고 합니다. 정족산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등사가 목적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전등사가 정족산성 안에 있기 때문에 성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매표소도 성문 밖에 있습니다. 문은 모두 네 곳에서 설치되었는데 주 출입문은 남문과 동문입니다. 남문은 대개의 성문처럼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문루도 설치되어 산성의 정문으로서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가 전등사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동진에서 불교를 전하기 위해 온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당시에 이곳은 백제 땅이었고 백제에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을 테니 아도가 절을 창건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했을 때는 진종사라고 했는데 그 후 어떤 기록에도 진종사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정족산성 남문을 지나 조금 올라오면 절의 중문격인 대조루를 만나고 여기를 통과하면 대웅전이 보입니다. 다른 절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해탈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산문의 형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대조루는 절에 들어가면서 보면 공중에 뜬 누각이지만 마당에서 보면 마당과 같은 높이의 대조루의 마루가 있는 것입니다. 마당을 확장해서 사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넓은 마루는 대중들을 모아 놓고 포교식을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됩니다. 대조루라는 이름은 바다를 바라보는 사찰 답게 바다에 밀려드는 조수를 마주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대조루를 통과하면 대웅보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법당이라는 뜻입니다. 내부를 보면 가운데 석가모니 불이 있고 좌우에 다른 부처가 있습니다. 가운데 부처를 주불 좌우에 부처는 ‘협시불’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의 협시불은 아미타불과 약사불입니다. 이렇게 세 분의 부처를 모시는 경우를 삼존불이라 합니다. 삼존불을 모시면 법당 이름을 ‘대웅보전’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의 기둥을 덤벙주초 위에 올렸습니다. 덤벙주초는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말하는데, 여기서 생각을 다듬지 않으면 실수를 하는 덤벙대다라는 말이 시작되었습니다. 덤벙주초에 기둥을 올리려면 기둥 아랫부분을 주춧돌의 굴곡에 맞춰 다듬어야 합니다. 제대로 다듬지 않으면 불안정해지므로 주춧돌을 굴곡에 맞추어 기둥의 아래 부분을 ‘그랭이 방식’으로 깎아야 합니다. 이 방식은 주춧돌과 기둥이 꽉 들어맞아 지진에도 엄청난 내구성을 가질 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자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인공적인 부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결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등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전쟁으로 소실된 대웅보전을 재건하기 위해 멀리서 목수를 초빙하여 법당 재건을 맡겼고 아랫마을 주막집에 방 한 칸을 빌려서 생활하다가 타향살이의 외로운 마음에 주막집 주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대웅보전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 주모는 그가 맡긴 품삯을 모두 가지고 다른 사내와 달아나 버렸다고 합니다. 도편수는 상실감과 분노를 전등사 마무리 작업에서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나무로 다듬어 대웅전 귀공포(모서리 기둥 위)에 쭈그리고 앉아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도록 했습니다. 부처님 보궁을 온몸으로 바치면서 참회하기를 바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설일 뿐입니다. 나녀상의 모습은 여인이라기 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기둥 위에 어떤 상을 올려두는 경우는 인도와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던 방법입니다. 대개 벽사(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력을 가진 원숭이를 올려두는 경우가 해당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등사에는 보물 393호로 지정된 범종이 있습니다. 실제 사용하지는 않지만 종을 보호하기 위한 종각이 만들어져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우리 눈에 익숙한 범종과는 다른 양식입니다. 중국 송나라에서 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전쟁 물자를 공출하면서 전등사에서 전해 오던 전등사 범종을 가져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패망했고, 주지가 범종을 찾아 수소문한 끝에 부평 병기창 자리에 큰 범종이 하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전등사 범종이 아니라 다른 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등사에 있던 원래 종은 못찾고 이 종을 전등사로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군수품으로 민간의 솥과 숟가락까지 공출해 갔다고 합니다. 사찰,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금속으로 된 것이면 강제로 빼앗겼습니다. 아시아 대부분이 일제의 손아귀에 있었던 곳이면 동일한 수탈을 당해야 했습니다. 중국 송나라 종도 그런 연유로 부평까지 오게 된 것이고, 지금까지 전등사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전등사 철종>

(부천지역 강화도 역사기행은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