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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41호

■ 시선집중

“이산가족, 하루빨리 자유 왕래했으면”

함경북도 무산에 사는 김학룡(가명)씨는 얼마 전 눈물겨운 상봉을 목격했다. 조선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1월에 월남한 아버지가 62년 만에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는 자리였다. 학룡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는 일에 나서보았는데 심장이 하도 떨려서 두 번은 못할 것 같지만, 생이별하고 지금껏 못 만나고 있는 이산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다.

올해 팔순이 넘은 황태섭(가명) 노인은 함경북도 명천 사람이라고 했다. 안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세 살, 작은 아들이 아직 돌도 안 된 핏덩이였을 때 혼자 월남했다. 그때는 잠시 다녀온다고 생각했는데, 영영 못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남조선과 중국이 수교한 뒤로, 이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찾으려고 몇 차례 중국에 드나들며 명천에 사람들을 보냈지만 숱한 돈만 날렸다. 남조선 돈 값을 잘 모르지만, 돈 천 만원은 족히 넘는다고 했다. 2000년에 북남정상이 만날 때,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는데, 성사가 안 됐다. 그 뒤로도 포기할 수 없어 몇 차례 시도를 더 해본 끝에 어쩌다 나한테 그 일이 맡겨졌다. 내가 장사는 여러 곳으로 다녀봤지만 사람 찾는 일은 처음이라서, 돈 욕심에 하겠다고는 했지만 내심 퍽 긴장했다. 어쨌거나 나 혼자 한 것은 아니고, 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찾아와 북경에까지 가서 넘겨주는 전반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 국경단속이 심해서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고 1950년도 당시의 주소와 두 아들들의 이름만 가지고 찾아 나섰다.

무산에서 청진까지, 청진에서 다시 명천까지 서비 차비만 3만원이 넘게 들었다. 몇 사람을 거치고 거치니 마침내 두 형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랫마을에 계시는 아버지가 찾는다는 소식에 그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두 형제가 한 날 한시에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일단 형님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의논하고, 이튿날 두만강을 건넜다.

국경연선지역에 가서는 군인 두 명에게 2,000위안을 찔러주었다.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미리 뚫어놓은 구멍으로 가시철조망을 지났다. 요즘은 밤에도 국경경비대나 무장경찰들이 순찰을 돌기 때문에 가급적 연선에서는 빨리 떠나야 한다. 차를 타거나 큰 길로 가서는 절대 안 되기에, 뒷산을 넘어 네다섯 시간을 내내 걸으니 깊은 산골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찾아가니, 소를 키우는 한족 집이 있었다. 200위안을 주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잘 삶은 돼지고기 반찬에 밥 두 사발을 후딱 먹고 다시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어서 인삼을 재배하는 한족 집에서 역시 200위안을 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젖은 신발을 말리면서 그날은 그 움막에서 잤다. 너무 지쳐서 오후에는 길을 더 갈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점심때가 되기 전에 작은 도시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룡정에서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100위안에 연길까지 가서 한 여관방에 들어갔다. 깨끗이 씻고 실컷 먹고 늘어지게 자는데 300위안을 썼다. 전화로 일단 서울에 알리고, 북경 가는 차표를 예약했다. 이튿날 12시, 우리 둘은 북경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한 사람당 차표 값이 350위안이었다.

장거리 이동에는 기차가 편하지만, 기차는 경찰들이 언제 단속하러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고생스럽기는 해도 버스를 탔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북경에 도착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황씨 어르신이 먼저 와 계셨다. 60년 넘게 떨어져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88세의 백발 아버지와 예순 다섯 살의 백발 아들이 드디어 만났다. 아들이 세 살 되던 해에 떠난 아버지가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다. 황씨 어르신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은 한 시간도 넘게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다. 옛날 살던 집 주소부터 어머니의 이름과 나이, 생일, 명천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삼촌과 고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살아생전 친척들이 살던 집과 집 주소 등등을 꼬치꼬치 묻고 확인하고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부자가 부둥켜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열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사흘이 지나자, 황씨 어르신은 나에게 고맙다고 거듭 치하하면서 3,000달러를 건네주었다. 내 생에 두 번 만져보기 힘들 큰돈이었다.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아들에게는 금가락지 2개와 금시계, 금목걸이를 각각 두 개씩 주고, 현금으로 5,000달러를 주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헤어져야 했다. 고작 사흘을 함께 지내고 다시 갈라져야 하는 것이 가슴 터지는 현실이었다. 황씨 어르신은 월남한 후에 아내를 얻어 자식 넷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 같이 온 가족들이 바로 그 아들들이라고 했다. 아들들은 이복형에게 건강하게 잘 사시라고, 통일되면 다시 꼭 만나자고 덕담을 건넸다. 큰 아들도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이 있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갖고 온 큰 아들의 가족사진과 둘째 아들의 가족사진을 갖고 서울로 가셨고, 큰 아들은 나와 함께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명천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갔다. 아버지가 주신 5,000달라에서 1,000달라를 인민폐로 바꿔 두만강을 건너는 군대에게 다시 2,000위안을 바치고, 도강할 때 도와 준 사람에게는 2,000위안을 더 주었다. 집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북경에 가서 생전 처음 이산가족을 상봉시키고 살아서 돌아왔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준 금가락지 두 개와 금목걸이 두 개를 동생과 하나씩 나눠 가졌지만, 금시계 두 개는 동생 모르게 슬쩍 챙겼다. 처음에 현금은 아예 동생에게 건네지도 않다가, 자기 아내와 반나절이나 다투고서야 1,000달러를 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도강비로 쓰고 남은 인민폐가 1,500위안 되었지만, 그 역시 내비치지 않았다. 연길에서 사 온 물건들 중에 애들이 입을만한 옷 몇 가지를 제수씨한테 건넸을 뿐이다. 제수씨와 동생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연신 눈시울을 붉히며 형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옥수수국수로 연명하던 세월을 당장 끝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큰 형네는 3,000달라와 인민폐 1,500원, 그리고 금시계 두개와 연길에서 사가지고 온 질 좋은 중국산 옷가지들만 갖고도 한 10년은 근심걱정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직접 만나지 못한 둘째 아들네가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제 욕심부터 차리게 되어있는 것이 가난한 우리네 실정인 것 같다. 큰형이 사람이 나빠서라기보다 재물을 보니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가 둘째 아들도 보고 싶다고 데려오라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렇게 큰형이 유리하게 셈을 끝내버렸다.

씁쓸한 것은 있지만 이들 부자 상봉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이렇게라도 만나 생사를 확인하고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남과 이북에는 꿈에라도 보고 싶고 찾고 싶은 부모형제, 친척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나야 그 사람들 덕분에 먹고 사는데 도움을 받았지만, 이렇게 큰돈 들여 목숨 걸고 숨어 만날 것이 아니라, 다 돌아 가시기전에 만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회령담배공장, 생산성 떨어뜨리는 3가지 : 전력과 물 부족, 인력관리

함경북도 회령 대성 담배공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령시 현지 지도할 때 꼭 들르는 대표적인 담배공장으로, 중국 청도 회사의 투자를 받아 운영되고 있다. 구소련에서 건설한 곡산공장을 담배공장으로 전환했는데, 중국에서 설비와 원자재 및 기술 지도를 제공한다. 중국인 기술자 한 명이 장기 주재원으로 파견된 상태인데, 필요한 경우 북한 노동자들을 청도 본 공장에 파견해 기술 지도를 받도록 하고 있다. 공장 근로자는 총 90명 가량이며, 공장장을 비롯해 관리일군 5명에 기술원 8명, 그리고 보위부원이 1명이 포함된다.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3,000원으로, 특별 수당을 더 하면 한 사람당 5,500-6,000원 정도 받는다. 중국 회사에서는 북한 노동자 1인당 50달러의 임금을 대성무역상사에 지불한다. 점심은 직장에서 제공해주며, 보통 일인당 옥수수빵 2개, 남새(야채)죽 한 사발, 그리고 배추절임이 나온다. 전력공급이 불안정해 정전 시에는 공장발전기를 돌려 쓴다. 물 공급도 잘 되지 않아서 중국 측에서 1톤짜리 물통을 가져왔다. 물이 나올 때 받아두었다가 응급 시에 사용한다. 물과 전기 부족 외에 노동자들이 수시로 사회 무보수 노동에 동원되다보니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중국 관리자들은 전력 사정과 물 부족은 임시로 대처한다고 하지만, 인력을 북한에서 관리하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토로하고 있다.

“원자탄보다 밥이 필요하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주민들의 동향 보고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원자탄보다는 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 말씀하셨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앉아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그런 공산주의 락원이 내일도 오지 않는다면 내가 원자탄을 안고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어 갈 것이요, 태평양을 헤엄쳐 미국 땅에 터뜨리고 말겠다”는 말도 청장년 세대를 사이에서 입버릇처럼 나돌고 있다. 원자탄보다 밥이 필요하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지적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기는 매 한가지인데 그럴 바에는 한번 부딪혀 보자는 표현이지, 진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지(死地)로 몰리는 절박한 심경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의 압제와 대북제재정책 때문에 못 먹고 못 사는 것이라 믿는 주민들이 여전히 많다는 소리다. 그러나 예전에는 모여 앉았다 하면 장군님이요 조국 통일과 주체 혁명이요 하는 말들만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물 건너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는 언제면 중국을 따라 갈수 있겠는 가 등 먹고 입는 문제들을 주로 얘기한다. ‘말반동분자’로 끌려갈만한 말인데도, 누가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단속하는 일이 드물다. 오히려 중국의 선진 기술과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에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다. 1980년대만 해도 재일교포들이 재력과 지위가 높았으나, 요즘은 화교다. 시장 물가를 통제하고 물건을 대량 수입하는 것도 화교이며, 화교를 통해 먹고사는 북한 주민들이 급격히 늘었다. 시장 장사꾼들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시장이 화교를 위시로 한 중국 자본 세력에 넘어갔다고 본다.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하면할수록, 중국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 체제는 더욱 안정될 것이고, 경제는 더욱 발전할 것”이 간부들의 생각이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중국식으로 경제를 발전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몰라도, 현재 이대로는 희망이 없으며, 중국처럼 잘 살게 되는 것이 민심이 바라는 유일한 꿈”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 새 지도부에 중국식 경제발전 원해

중앙당의 한 간부는 최근 전국 민심 동향 조사에서 주민들이 새 지도부에 갖는 인식이 나쁘지 않다고 전했다. 지난 해 10월 10일 후부터 최근까지 올라온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주민들은 정치 체제는 변화가 없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생기길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국 보안당국의 비밀 조사 결과, 백성들은 김정은 동지께서 꼭 중국식으로 경제를 추켜 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당과 지방 관리들도 이렇게 생각 한다. 현재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곧 중국식 경제발전을 바라는 것이 민심”이라고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여 앉으면 올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북한 군사충돌을 비롯해 어떠한 군사충돌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도 콱 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많이 하지만, 그것은 고달픈 현실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일 뿐, 실제로 전쟁을 원하는 주민들은 없다는 것이 중앙당 간부의 생각이다. 그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께서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지방에서 어떤 인력 교체도 인사이동도 없으며, 군부대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장군님께서는 2010년부터 가까운 친인척과 최측근들로 새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작년 9월 말에 이양작업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10월부터는 김정은 동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관료계층에 대한 배려가 장군님 시절보다 더 높아졌다. 관료들의 충성도가 하락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에 대한 배려는 여전히 미흡하다. 김정은 부위원장의 생일에는 휴일이 없었다. 음력설에는 3일의 연휴기간을 주었으나, 식량 배급이나 특별한 명절 선물 같은 것은 없었다. 간부 계층과 일부 잘 나가는 회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주민들은 빈손으로 설 명절을 보내야 했다. 당 간부들은 “지난 해 남쪽 곡창지대에서 큰물 피해가 심해 식량 사정이 나빠졌으므로 식량을 더 아껴 써야 한다. 2월 16일 명절에는 (공급을) 많이 줄 것”이라며 넘어갔을 뿐이다. 1월부터 100% 전력공급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던 평양시도 난감한 상황이다. 중구역과 번화가, 특급기업소, 특수단위 등의 전력공급 사정은 다소 좋아졌으나, 대민용 전력공급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오히려 더 못해졌다는 불만도 나온다. 이에 중앙당의 간부는 새 지도부가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으려면 그들이 먹고 사는 의식주 문제를 먼저 해결해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국경경비, 중국 의식해 “총기 사용 말라”

중앙당은 국경지역에서 총소리를 울리지 말라고 보안당국 및 군부대에 지시했다. 지난해에는 이유 불문하고 도강자를 발견하는 즉시 세 차례의 경고에도 서지 않을 경우 총기를 사용하도록 했었다. 남조선 국정원의 간첩 임무를 받고 조국의 비밀들을 빼돌려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드는 도강자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최근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국경경비를 강화하되, 조․중 두 나라의 친선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총기는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도강분자를 발견하더라도 총을 쓰지 말고, 중국 변방대와 협력해 붙잡도록 해야 한다”고 총기 사용 방침을 철회했다. 또 불법 행위가 의심되는 중국인에 대해서도 예심에서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과도한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발생해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를 막자는 것이다. 총기 사용 금지를 들은 주민들은 잘됐다고 하면서도 중국을 생각하는 반의반이라도 주민들을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이산가족 상봉 하루빨리 재개해야

지난 연말, 충남의 한 어르신께서 좋은벗들의 소식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전화를 주셨다. ‘오늘의 북한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있는 대로 다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평양에 큰 형님이 살아 계시는데, 북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알 수 있어 꼭 받고 싶다고 했다. 큰형님과는 지난 2003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만나 뵈었다고 한다. 2008년에 평양 사는 조카딸이 단동에 나가는 친구에게 부탁해 남한의 작은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와 2,500달러를 보냈지만 중간에 친구가 가로채 버렸다. 그 뒤로 탈북자를 통해 1,500달러를 보냈지만 역시 실패, 세 번째, 네 번째도 실패, 돈을 주는 족족 중간에서 새버렸다. 작년에는 급기야 당신이 직접 단동에 나가 사람을 물색해 겨우 평양의 조카딸과 통화를 하고, 1,800달러를 보낼 수 있었다. 조카 말로는 평양도 살기가 너무 어려워져, 이산가족 상봉 때 작은아버지들에게 받은 금가락지를 팔아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다고 했다. 어르신은 여러 번 실패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니 희망을 잃지 말고 가족들을 계속 찾아볼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니, 애타는 당사자들이 막대한 사비를 들여 좌충우돌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이산가족은 “고향이 싫어 떠나 온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떠난” 사람들이다. 꿈에서도 목메어 불러보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시대가 만든 아픔을 우리가 함께 풀어주어야 한다. 한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만나게 해드려야 한다. 이산가족 및 납북자가족 상봉과 대북식량지원 등의 문제에 대해서 만이라도 남북한 정부는 조건 없이 협력해야한다.

■ 정치생활

“이산가족, 하루빨리 자유 왕래했으면”

함경북도 무산에 사는 김학룡(가명)씨는 얼마 전 눈물겨운 상봉을 목격했다. 조선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1월에 월남한 아버지가 62년 만에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는 자리였다. 학룡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는 일에 나서보았는데 심장이 하도 떨려서 두 번은 못할 것 같지만, 생이별하고 지금껏 못 만나고 있는 이산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다.

올해 팔순이 넘은 황태섭(가명) 노인은 함경북도 명천 사람이라고 했다. 안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세 살, 작은 아들이 아직 돌도 안 된 핏덩이였을 때 혼자 월남했다. 그때는 잠시 다녀온다고 생각했는데, 영영 못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남조선과 중국이 수교한 뒤로, 이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찾으려고 몇 차례 중국에 드나들며 명천에 사람들을 보냈지만 숱한 돈만 날렸다. 남조선 돈 값을 잘 모르지만, 돈 천 만원은 족히 넘는다고 했다. 2000년에 북남정상이 만날 때,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는데, 성사가 안 됐다. 그 뒤로도 포기할 수 없어 몇 차례 시도를 더 해본 끝에 어쩌다 나한테 그 일이 맡겨졌다. 내가 장사는 여러 곳으로 다녀봤지만 사람 찾는 일은 처음이라서, 돈 욕심에 하겠다고는 했지만 내심 퍽 긴장했다. 어쨌거나 나 혼자 한 것은 아니고, 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찾아와 북경에까지 가서 넘겨주는 전반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 국경단속이 심해서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고 1950년도 당시의 주소와 두 아들들의 이름만 가지고 찾아 나섰다.

무산에서 청진까지, 청진에서 다시 명천까지 서비 차비만 3만원이 넘게 들었다. 몇 사람을 거치고 거치니 마침내 두 형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랫마을에 계시는 아버지가 찾는다는 소식에 그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두 형제가 한 날 한시에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일단 형님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의논하고, 이튿날 두만강을 건넜다.

국경연선지역에 가서는 군인 두 명에게 2,000위안을 찔러주었다.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미리 뚫어놓은 구멍으로 가시철조망을 지났다. 요즘은 밤에도 국경경비대나 무장경찰들이 순찰을 돌기 때문에 가급적 연선에서는 빨리 떠나야 한다. 차를 타거나 큰 길로 가서는 절대 안 되기에, 뒷산을 넘어 네다섯 시간을 내내 걸으니 깊은 산골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찾아가니, 소를 키우는 한족 집이 있었다. 200위안을 주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잘 삶은 돼지고기 반찬에 밥 두 사발을 후딱 먹고 다시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어서 인삼을 재배하는 한족 집에서 역시 200위안을 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젖은 신발을 말리면서 그날은 그 움막에서 잤다. 너무 지쳐서 오후에는 길을 더 갈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점심때가 되기 전에 작은 도시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룡정에서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100위안에 연길까지 가서 한 여관방에 들어갔다. 깨끗이 씻고 실컷 먹고 늘어지게 자는데 300위안을 썼다. 전화로 일단 서울에 알리고, 북경 가는 차표를 예약했다. 이튿날 12시, 우리 둘은 북경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한 사람당 차표 값이 350위안이었다.

장거리 이동에는 기차가 편하지만, 기차는 경찰들이 언제 단속하러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고생스럽기는 해도 버스를 탔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북경에 도착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황씨 어르신이 먼저 와 계셨다. 60년 넘게 떨어져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88세의 백발 아버지와 예순 다섯 살의 백발 아들이 드디어 만났다. 아들이 세 살 되던 해에 떠난 아버지가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다. 황씨 어르신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은 한 시간도 넘게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다. 옛날 살던 집 주소부터 어머니의 이름과 나이, 생일, 명천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삼촌과 고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살아생전 친척들이 살던 집과 집 주소 등등을 꼬치꼬치 묻고 확인하고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부자가 부둥켜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열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울었다.

사흘이 지나자, 황씨 어르신은 나에게 고맙다고 거듭 치하하면서 3,000달러를 건네주었다. 내 생에 두 번 만져보기 힘들 큰돈이었다.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아들에게는 금가락지 2개와 금시계, 금목걸이를 각각 두 개씩 주고, 현금으로 5,000달러를 주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헤어져야 했다. 고작 사흘을 함께 지내고 다시 갈라져야 하는 것이 가슴 터지는 현실이었다. 황씨 어르신은 월남한 후에 아내를 얻어 자식 넷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 같이 온 가족들이 바로 그 아들들이라고 했다. 아들들은 이복형에게 건강하게 잘 사시라고, 통일되면 다시 꼭 만나자고 덕담을 건넸다. 큰 아들도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이 있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갖고 온 큰 아들의 가족사진과 둘째 아들의 가족사진을 갖고 서울로 가셨고, 큰 아들은 나와 함께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명천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갔다. 아버지가 주신 5,000달라에서 1,000달라를 인민폐로 바꿔 두만강을 건너는 군대에게 다시 2,000위안을 바치고, 도강할 때 도와 준 사람에게는 2,000위안을 더 주었다. 집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북경에 가서 생전 처음 이산가족을 상봉시키고 살아서 돌아왔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준 금가락지 두 개와 금목걸이 두 개를 동생과 하나씩 나눠 가졌지만, 금시계 두 개는 동생 모르게 슬쩍 챙겼다. 처음에 현금은 아예 동생에게 건네지도 않다가, 자기 아내와 반나절이나 다투고서야 1,000달러를 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도강비로 쓰고 남은 인민폐가 1,500위안 되었지만, 그 역시 내비치지 않았다. 연길에서 사 온 물건들 중에 애들이 입을만한 옷 몇 가지를 제수씨한테 건넸을 뿐이다. 제수씨와 동생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연신 눈시울을 붉히며 형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옥수수국수로 연명하던 세월을 당장 끝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큰 형네는 3,000달라와 인민폐 1,500원, 그리고 금시계 두개와 연길에서 사가지고 온 질 좋은 중국산 옷가지들만 갖고도 한 10년은 근심걱정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직접 만나지 못한 둘째 아들네가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제 욕심부터 차리게 되어있는 것이 가난한 우리네 실정인 것 같다. 큰형이 사람이 나빠서라기보다 재물을 보니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가 둘째 아들도 보고 싶다고 데려오라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렇게 큰형이 유리하게 셈을 끝내버렸다.

씁쓸한 것은 있지만 이들 부자 상봉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이렇게라도 만나 생사를 확인하고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남과 이북에는 꿈에라도 보고 싶고 찾고 싶은 부모형제, 친척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나야 그 사람들 덕분에 먹고 사는데 도움을 받았지만, 이렇게 큰돈 들여 목숨 걸고 숨어 만날 것이 아니라, 다 돌아 가시기전에 만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원자탄보다 밥이 필요하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주민들의 동향 보고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원자탄보다는 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 말씀하셨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앉아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그런 공산주의 락원이 내일도 오지 않는다면 내가 원자탄을 안고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어 갈 것이요, 태평양을 헤엄쳐 미국 땅에 터뜨리고 말겠다”는 말도 청장년 세대를 사이에서 입버릇처럼 나돌고 있다. 원자탄보다 밥이 필요하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지적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기는 매 한가지인데 그럴 바에는 한번 부딪혀 보자는 표현이지, 진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지(死地)로 몰리는 절박한 심경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의 생각이 변하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의 압제와 대북제재정책 때문에 못 먹고 못 사는 것이라 믿는 주민들이 여전히 많다는 소리다. 그러나 예전에는 모여 앉았다 하면 장군님이요 조국 통일과 주체 혁명이요 하는 말들만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물 건너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는 언제면 중국을 따라 갈수 있겠는 가 등 먹고 입는 문제들을 주로 얘기한다. ‘말반동분자’로 끌려갈만한 말인데도, 누가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단속하는 일이 드물다. 오히려 중국의 선진 기술과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에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다. 1980년대만 해도 재일교포들이 재력과 지위가 높았으나, 요즘은 화교다. 시장 물가를 통제하고 물건을 대량 수입하는 것도 화교이며, 화교를 통해 먹고사는 북한 주민들이 급격히 늘었다. 시장 장사꾼들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시장이 화교를 위시로 한 중국 자본 세력에 넘어갔다고 본다.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하면할수록, 중국식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 체제는 더욱 안정될 것이고, 경제는 더욱 발전할 것”이 간부들의 생각이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중국식으로 경제를 발전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몰라도, 현재 이대로는 희망이 없으며, 중국처럼 잘 살게 되는 것이 민심이 바라는 유일한 꿈”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 새 지도부에 중국식 경제발전 원해

중앙당의 한 간부는 최근 전국 민심 동향 조사에서 주민들이 새 지도부에 갖는 인식이 나쁘지 않다고 전했다. 지난 해 10월 10일 후부터 최근까지 올라온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주민들은 정치 체제는 변화가 없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생기길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국 보안당국의 비밀 조사 결과, 백성들은 김정은 동지께서 꼭 중국식으로 경제를 추켜 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당과 지방 관리들도 이렇게 생각 한다. 현재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곧 중국식 경제발전을 바라는 것이 민심”이라고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여 앉으면 올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북한 군사충돌을 비롯해 어떠한 군사충돌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도 콱 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많이 하지만, 그것은 고달픈 현실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일 뿐, 실제로 전쟁을 원하는 주민들은 없다는 것이 중앙당 간부의 생각이다. 그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께서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지방에서 어떤 인력 교체도 인사이동도 없으며, 군부대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장군님께서는 2010년부터 가까운 친인척과 최측근들로 새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작년 9월 말에 이양작업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10월부터는 김정은 동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관료계층에 대한 배려가 장군님 시절보다 더 높아졌다. 관료들의 충성도가 하락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에 대한 배려는 여전히 미흡하다. 김정은 부위원장의 생일에는 휴일이 없었다. 음력설에는 3일의 연휴기간을 주었으나, 식량 배급이나 특별한 명절 선물 같은 것은 없었다. 간부 계층과 일부 잘 나가는 회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 주민들은 빈손으로 설 명절을 보내야 했다. 당 간부들은 “지난 해 남쪽 곡창지대에서 큰물 피해가 심해 식량 사정이 나빠졌으므로 식량을 더 아껴 써야 한다. 2월 16일 명절에는 (공급을) 많이 줄 것”이라며 넘어갔을 뿐이다. 1월부터 100% 전력공급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던 평양시도 난감한 상황이다. 중구역과 번화가, 특급기업소, 특수단위 등의 전력공급 사정은 다소 좋아졌으나, 대민용 전력공급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오히려 더 못해졌다는 불만도 나온다. 이에 중앙당의 간부는 새 지도부가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으려면 그들이 먹고 사는 의식주 문제를 먼저 해결해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국경경비, 중국 의식해 “총기 사용 말라”

중앙당은 국경지역에서 총소리를 울리지 말라고 보안당국 및 군부대에 지시했다. 지난해에는 이유 불문하고 도강자를 발견하는 즉시 세 차례의 경고에도 서지 않을 경우 총기를 사용하도록 했었다. 남조선 국정원의 간첩 임무를 받고 조국의 비밀들을 빼돌려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드는 도강자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최근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국경경비를 강화하되, 조․중 두 나라의 친선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총기는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도강분자를 발견하더라도 총을 쓰지 말고, 중국 변방대와 협력해 붙잡도록 해야 한다”고 총기 사용 방침을 철회했다. 또 불법 행위가 의심되는 중국인에 대해서도 예심에서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과도한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발생해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를 막자는 것이다. 총기 사용 금지를 들은 주민들은 잘됐다고 하면서도 중국을 생각하는 반의반이라도 주민들을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 경제활동

회령담배공장, 생산성 떨어뜨리는 3가지 : 전력과 물 부족, 인력관리

함경북도 회령 대성 담배공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령시 현지 지도할 때 꼭 들르는 대표적인 담배공장으로, 중국 청도 회사의 투자를 받아 운영되고 있다. 구소련에서 건설한 곡산공장을 담배공장으로 전환했는데, 중국에서 설비와 원자재 및 기술 지도를 제공한다. 중국인 기술자 한 명이 장기 주재원으로 파견된 상태인데, 필요한 경우 북한 노동자들을 청도 본 공장에 파견해 기술 지도를 받도록 하고 있다. 공장 근로자는 총 90명 가량이며, 공장장을 비롯해 관리일군 5명에 기술원 8명, 그리고 보위부원이 1명이 포함된다.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3,000원으로, 특별 수당을 더 하면 한 사람당 5,500-6,000원 정도 받는다. 중국 회사에서는 북한 노동자 1인당 50달러의 임금을 대성무역상사에 지불한다. 점심은 직장에서 제공해주며, 보통 일인당 옥수수빵 2개, 남새(야채)죽 한 사발, 그리고 배추절임이 나온다. 전력공급이 불안정해 정전 시에는 공장발전기를 돌려 쓴다. 물 공급도 잘 되지 않아서 중국 측에서 1톤짜리 물통을 가져왔다. 물이 나올 때 받아두었다가 응급 시에 사용한다. 물과 전기 부족 외에 노동자들이 수시로 사회 무보수 노동에 동원되다보니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중국 관리자들은 전력 사정과 물 부족은 임시로 대처한다고 하지만, 인력을 북한에서 관리하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토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