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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108호

■ 시선집중

고난의 행군 시절보다 더 어려운 집들 많아

일부 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됐다는 말들이 돌고 있다. 특히 지난 해 여름철이 고난의 행군 시기와 아주 흡사한데, 식량사정은 오히려 그 때보다 못한 집들이 더 많다고 했다. 점점 살면 살수록 앞날이 컴컴하다는 말들도 나온다. 1994년 고난의 행군 당시 식량난이 본격화돼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갔던 현상이 2007년에 다시 나타난 데다 작년 가을 수확량이 턱없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영양실조로 사람이 죽어가고 산 사람들도 죽지 못해 겨우 살았던 때라고 한다. 식량사정이 계속 풀리지 않아 대량아사가 몇 년간 지속됐던 그 때의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한 주민은 “그때는 비배관리도 없이 배급으로만 살았는데 배급이 끊기자 돼지들이 먹는 능쟁이 풀에 강냉이 묵지가루를 한 줌 넣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사람들은 식량보다 기본적으로 풀을 많이 먹었고 굶어서 죽은 사람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그때부터 공화국에 도적들이 많이 생겼으며 집 텃밭에 감자나 강냉이를 심으면 하룻밤에 도적맞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한 주민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더 안 좋아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2007년이 고난의 행군 시절을 떠올릴 만큼 매우 힘든 한 해였다고 했다.

“2012년이면 완전히 완성된 강성대국 맞을 것”

새해를 맞아 각 단위별 간부들의 학습이 진행되고 있다. 요즘 강연회에서는 강성대국의 해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강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12년을 명시하고 있다. 2012년이 바로 고(故) 김일성 주석의 탄생 100돌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강연회에서는 “2012년이 되면 우리 공화국이 이때까지 고생한 것과는 대비도 안 되게 완전히 완성된 강성대국의 해를 맞이할 것이고, 이때부터는 모든 곤란이 풀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한 간부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며,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회의가 끝나면 정말 그렇게 될까 의문을 갖는 간부들이 많다고 했다.

■ 경제활동

교통사고 피해자 도리어 구타당해

지난 1월 17일 청진의 청암 구역 락산리 도로에서 로창 수산사업소 화물자동차와 락산리의 해군 기지 후방부 화물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해군기지 차량 운전수가 부상당하고, 로창 수산사업소 차량에 탔던 한 여성 장사꾼이 사망했다.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은 쪽은 해군기지 차량이었으나, 사고 현장에 있던 해군 병사들이 도리어 피해차량 운전수를 구타해 목격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군대 보급 식량 실은 차량 전복 사고

지난 해 12월 25일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대문리에서 신의주로 가던 군대 보급용 식량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적지함 위에 탔던 노동자 3명과 신의주 인근 부대 군인 2명, 모두 5명이 사망했다.

회령시 방문했던 평양 간부 10여 명 교통사고

지난 해 12월 23일, 김정숙 탄생 기념행사 참석차 회령시를 방문했던 평양 간부 10여 명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회령 동상 앞에서 시당으로 내려가는 도로에서 행사에 동원된 평양 국제려행사 버스와 회령시 화물차가 충돌해 차량 앞부분이 심하게 파손됐다. 회령시 보안서 교통 단속대에서는 화물 운전사를 구속했다. 국제려행사 운전수와 간부 10여 명은 회령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청진 병원에 구급을 요청해 청진 의사들이 긴급히 조직돼 진료했는데, 일부 환자는 위독해 청진 병원으로 이송됐다.

김일성종합대학도 돈 주면 합격 가능

평양의 한 간부는 자녀를 김일성 종합대학교에 보내려고 1,000달러 넘게 썼다고 했다. 돈 많은 집이나 간부들은 다 이런 식으로 자녀를 대학에 보낸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일부 학생들의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도 했다. 시험도 돈을 찔러주면 쉽게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 사는 집의 자녀들은 소비 돈으로 한 달에 50-60만 원을 쓸 정도로 부유하게 지낸다고 한다. 반면 가난한 학생들은 학생 기숙사에서 아침으로 옥수수와 안남미가 절반씩 섞인 5대 5밥(120g)을 먹고, 점심에는 빵 몇 개, 저녁에는 국수 등으로 겨우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 지내는 형편이다.

다른 지역에서 개성 들어가기 불편

다른 지역에서 개성에 들어가기가 매우 불편하다. 원래부터 전연지대라 개성에 들어가는 게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출장 한 번 가려고 해도 어느 공장에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일일이 기록해야 하고, 개성에 확인한 뒤에야 겨우 통행증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 개성공단이 들어서면서 몇 배나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게 됐다. 일단 증명서 발급이 잘 안 된다. 설령 증명서를 받았다 해도 개성시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전 검열 강도가 더 세져 한 번 들어가려고 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한다.

한 간부는 “개성시에 려행가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우리 공화국과 한국의 생활적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을 우려해 통제를 강화하는 거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곳이 개성이다. 개성공단하면 사람들은 한국을 떠올린다. 한국 상품을 사용해봤거나 조금이라도 한국 소식을 아는 주민들은 남한에 대해 동경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특히 개성공단은 북한 내 다른 지역과 접촉이 단절된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동경어린 소문이 돌면 일반 주민들은 그런 가보다 생각한다. 북한 당국의 의도와 다르게,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개성시 출입을 통제하는 만큼 한국에 대한 환상은 더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개성공단, “일 놓칠까 봐 남조선 로동 고문 눈치 봐”

개성공단이 들어선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개성공단에 관한 이야기들이 평양, 남포, 원산 등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반 주민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퍼지고 있다. 개성공단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한국 기업과의 원활한 합작으로 일체 설비 자재 등 한국의 선진 설비가 들어오고, 북한은 로동력을 대고 있다고 알고 있다. 평양의 한 주민은 “개성공단에는 남조선에서 로동 고문들이 들어와 노동자들의 일을 감독하는데, 아침 출근을 제 시간에 하지 않거나 일을 잘하지 않으면 남조선 고문이 래일부터 일 안 나와도 좋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그 로동자는 무조건 퇴직당하고 일을 못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로동자들 서로가 직장 일을 놓칠까봐 남조선 고문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라도 맡은 일을 무조건 완성하기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일부 공개처형자들 뒤늦게 명예회복

지난 1997년과 98년에는 보위사령부 주도 아래 수많은 간부와 지식인, 귀국자들이 애매한 이유로 공개처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 지난 해 연말 당시 처형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 간부들이 뒤늦게 명예를 회복했다.

설 전날 1997년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집에 위로 차원에서 중앙 당 간부들이 방문했다. 중앙당 간부는 아들들의 심문 기록과 범죄 기록을 검토해봤으나 죄라고 성립될만한 사건 기록이 없었다며, 무슨 이유로 총살당했는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 간부는 자기가 아는 형님도 영문도 모르고 총살당했는데 작년에 루명을 벗었다고 했다. 어쨌든 늦게나마 남편과 두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은 모두 당과 장군님의 은덕이라고 전했다. 그동안 차마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던 남편과 두 아들의 억울한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간부가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죄 없이 영감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면서 대성통곡했다.

‘아오지’는 “아 오지마오”

북한에서는 함경북도 은덕군을 아오지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먹고 살 것이 너무도 없어 다른 고장에서 사람이 찾아오면, “아 오지마오”라고 한다 해서 아오지가 됐다고 한다. 이 곳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보통 농촌 마을이 그렇듯 옥수수밥에 된장국과 김치 정도다. 쌀밥에 두부국은 명절날 겨우 구경할 수 있을까 말까다. 명절이나 생일 때가 돌아오면 부모들의 걱정과 부담은 커진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은 명절이나 생일이 돼야 그동안 못 먹던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계속 명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배고픔과 설움 많은 땅 은덕군이 “아 오지마오” 의 ‘아오지’라는 이름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자조했다.

함북지역, 주민 전력 공급 중단으로 식수난 심각

지난 해 연말부터 회령, 청진 등 함경북도 주요 도시에 전기가 아직까지 공급되지 않고 있다. 주민 세대에 공급되는 전기는 평균 하루 1시간을 넘지 않거나 그조차 없을 때가 많다. 전력공급이 중단된 상태라 식수 문제가 심각하다. 새해 첫날에도 회령시 주민들은 양동이를 들고 강가에서 물을 길어먹었다. 수돗물이 어쩌다 잠깐 나와도 1층 주민들이나 겨우 20-30리터 받을까 말까한다. 모든 전력을 농촌 지원과 공장에 돌려 생활 용품과 농기구 등을 생산하기 위해 주민 세대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산업 전력도 제대로 공급이 안 돼 실제 돌아가는 공장은 거의 없다. 공장 간부들은 “과제 임무는 수없이 떨어지는데 자재는 그렇다 치고 전력 하나 제대로 공급 못하면서 재촉만 불같이 하니 우리라고 무슨 용빼는 수가 있는 가”라고 의견을 제기한다. “임무를 완성 못하면 경을 치겠지, 그렇다고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제 완성은 불가능하다”며 골머리를 앓는 모습이다.

배고픔에 군부대 탈영자 잇따라

춥고 배고픈 겨울이 되자 각 부대에서 탈영하는 군인들이 늘고 있다. 지난 12월 말 함경북도 은덕군에서는 훈련기간 중 배고픔을 못 이겨 탈영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인근 농장 부락에서 도적질을 하다 록야리 분주소에서 체포됐다. 한 기동 중대에서도 20살 병사가 배고파 도저히 군 생활을 못하겠다며 탈영했다. 탈영자를 수색하느라 비상령이 내려 다른 중대까지 무기를 지참하고 수색에 나섰다.

군부대에서 탈영이 잇따르고 있는 것은 모두들 한 목소리로 배고픔 때문이라 말한다. 150g 될까 말까한 옥수수밥 한 끼를 염장배추나 소금국에 주는데 한창 배고플 나이에 허기가 져 죽을 것만 같다고 한다. 열흘에 한 번 콩비지 물을 주는 부대는 그래도 사정이 좋은 곳이라고 한다. 겨울 내복은 구경도 못해봤다며, 하도 추워 여름 반팔을 속에 껴입고 솜 동복을 걸치고 있다고 했다. 추위와 배고픔이 계속되고 있어 탈영병이 앞으로도 줄어들지는 않을 전망이다.

1월 20일까지 농촌 돕기 퇴비 생산 총동원 기간

북한 당국은 전국적으로 1월 3일부터 1월 20일까지 농촌을 돕기 위한 총동원 기간으로 정하고, 관련 기관에 협력을 당부했다. 봄 농사를 지으려면 무엇보다 비료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퇴비 생산에 모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당․정 간부들이 모두 앞장서야 한다며, 개인 용무로 농촌 지원에 빠지거나 자리를 뜨는 간부가 있으면 당적 책벌을 주거나 사안이 엄중 하다고 판단될 경우 철직시킬 것이라 엄포했다. 이에 따라 각 도, 시, 군들의 당 집행 전원회의는 공동사설 집행 총화로 농촌 부문 퇴비 총동원에 대한 정형과 각 단위들의 퇴비 계획 수행 여부에 대해 집중 회의하기로 했다. 만약 퇴비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단위가 있으면, 20일이 지나도 계획을 완수할 때까지 동원을 계속할 예정이다. 현재 퇴비 총동원에 참가하는 대상은 시 인민위원회, 각 공장, 기업소, 동사무소, 녀맹원, 년로 보장자, 당 세포 및 기타 당원들, 학생 등 거의 모든 단위가 총망라돼있다.

“옥수수 삶아 먹으면 헤프다”

어떤 주민들은 없는 식량을 아끼고 아껴 먹는 고육지책으로 옥수수를 채칼에 갈아 감자를 넣고 죽 밥을 해먹고 있다. 옥수수를 삶아 먹으면 헤프게 먹는다며 이렇게 먹어야 더 아껴먹을 수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추수철이 끝났지만 손에 쥐는 식량이 너무 적어 앞날이 깜깜하다며 한탄하고 있다. 지난 해 식량 원천이 고갈될 당시, 5월 말부터 8월 달 사이에 집에 있는 여성들은 아침과 저녁에는 위를 비우지 않을 정도로 먹고 점심 한 끼는 보통 굶었다. 당시 가족 생계를 꾸려가던 일부 주부들은 정말 생활하기가 힘들어 더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추수한 식량이 조금이라도 들어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식량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 여성은 “한 해 동안 농사를 애 떨어지게 지어도 잘된 집이라도 몇 달 유지 못한다. 아끼고 또 아끼는 방법밖에 없다. 정말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겨우 살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여성은 “밥을 하면 제일 많이 불어나는 보리를 사서 감자와 섞어 먹는다. 혹간 돈이라도 좀 손에 쥐는 날 어쩌다 강냉이 국수 사먹는 날은 정말 재수 좋은 날이다. 대체로 돈을 좀 버는 집들은 강냉이 국수를 먹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부식물 구경은 못하고 죽물만 겨우 삼키며 살고 있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추수가 끝난 이후에도 쌀 가격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1,400원대로 오르고 있으며 수입쌀(안남미)은 1,10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횐율도 오르고 있어 인민폐 100위안이 4만 4천원이다.

2008년 1월 중순 4개 도시 쌀, 옥수수 값

(단위: kg/북한 원)

지역 곡물옥수수
함북 청진1,400550
함남 함흥1,400680
평남 평성1,300670
평남 순천1,250650

고난의 행군 시절보다 더 어려운 집들 많아

일부 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됐다는 말들이 돌고 있다. 특히 지난 해 여름철이 고난의 행군 시기와 아주 흡사한데, 식량사정은 오히려 그 때보다 못한 집들이 더 많다고 했다. 점점 살면 살수록 앞날이 컴컴하다는 말들도 나온다. 1994년 고난의 행군 당시 식량난이 본격화돼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죽어갔던 현상이 2007년에 다시 나타난 데다 작년 가을 수확량이 턱없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영양실조로 사람이 죽어가고 산 사람들도 죽지 못해 겨우 살았던 때라고 한다. 식량사정이 계속 풀리지 않아 대량아사가 몇 년간 지속됐던 그 때의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한 주민은 “그때는 비배관리도 없이 배급으로만 살았는데 배급이 끊기자 돼지들이 먹는 능쟁이 풀에 강냉이 묵지가루를 한 줌 넣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사람들은 식량보다 기본적으로 풀을 많이 먹었고 굶어서 죽은 사람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그때부터 공화국에 도적들이 많이 생겼으며 집 텃밭에 감자나 강냉이를 심으면 하룻밤에 도적맞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한 주민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더 안 좋아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2007년이 고난의 행군 시절을 떠올릴 만큼 매우 힘든 한 해였다고 했다.

“2012년이면 완전히 완성된 강성대국 맞을 것”

새해를 맞아 각 단위별 간부들의 학습이 진행되고 있다. 요즘 강연회에서는 강성대국의 해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강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12년을 명시하고 있다. 2012년이 바로 고(故) 김일성 주석의 탄생 100돌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강연회에서는 “2012년이 되면 우리 공화국이 이때까지 고생한 것과는 대비도 안 되게 완전히 완성된 강성대국의 해를 맞이할 것이고, 이때부터는 모든 곤란이 풀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한 간부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며,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회의가 끝나면 정말 그렇게 될까 의문을 갖는 간부들이 많다고 했다.

2007년도가 식량 사정 최악

겨우겨우 연명할 정도로만 살고 있는 일부 노동자들은 식량 사정만 봤을 때 2007년도가 최악이라고 말한다. 비배관리 경작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는데, 2007년도에는 비배관리를 없애고 배급으로 주라는 방침이 내려 농사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단위와 지역에 따라 비배관리 경작을 계속 한 곳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의 노동자들은 생활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방침대로라면 비배관리 대신 배급이 나와야 하는데 식량 원천이 고갈된 상태에서 배급이 나올 리 만무했다. 일부 주민들은 땅뙈기도 못 얻고 배급도 안 나오자, 동료나 이웃들 중에 생활 의욕을 완전히 잃고 타락한 사람들이 생겼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깝게 지내던 농장원의 집이나 형제들 집에 밤중에 가만히 들어가 털다가 들키자 달아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막막하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술 동냥으로 허송세월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까지 곽지로 땅을 일궈 옥수수를 심어 먹기도 했다. 실제 길에 옥수수를 심어 가꿨던 한 주민은, 옥수수에 이삭이 달리면 알이 여물기도 전에 이삭을 따서 삶아 먹었다고 한다. 누군가 채가기 전에 일단 입으로 넣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그 이삭조차 좀 더 아껴먹으려고 알을 잘게 쪼개서 감자와 섞어 죽을 쒀먹었다고 한다.

“비배관리 경작이 생계에 도움”

일반 노동자들은 그나마 비배관리 경작이 생계에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한 노동자는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쳐 2000년 이후에 사람들은 점차 산밭에 땅을 얻어 죽기 살기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배부르게 먹지는 못해도 그런대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개인 소토지 농사를 지어 본 경험으로, 2003년부터는 공장, 기업소에서 농장으로부터 얼마간 받은 땅을 노동자들에게 경작하도록 한 비배관리를 하면서 생계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일반 공장과 기업소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5월 말부터 8월까지 제일 바쁜데, 4-5월까지는 전 해에 농사지은 것으로 겨우 식량조절을 하지만, 6월부터는 입에 풀칠하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어떤 세대들에서는 감자 철까지 식량을 맞추려고, 가을에 2-3배로 갚아주기로 하고 잘 사는 집에서 통옥수수를 꿔먹기도 한다. 감자 철이 되면 하루 세 끼를 삶은 감자로만 먹는 날들이 많다. 이렇게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농사를 지으려고, 겨울에 인분을 모아 말린 퇴비를 등짐에 지고 산밭에 올라가 옥수수와 기타 작물을 정성스레 가꾸고 키운다. 하지만 가을에 땅세와 식량 값에 빚까지 갚고 나면 본전 뽑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비배경작을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가 정말 크다고 이구동성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