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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272호

■ 시선집중

3.8 선거 끝나자 다시 시장 단속 시작

3월 8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끝나자 전국적으로 시장 단속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 40세 미만 여성들은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고, 거래 금지 품목들이 재 열거됐다. 순천 시장의 한 시장관리일꾼은 “(시장에서) 팔지 못하게 된 상품 목록들을 붙였다. 남조선 상품, 미국 상품, 합영 상품, 일체 전자제품들, 인형들, 나무가구류들, 중기들 등 다 못 팔게 된다. 공업품도 기성복들은 한 사람 당 5벌 이상, 가공품들은 10벌 이상 팔면 안 된다. 알곡류는 최대 20kg까지만 팔 수 있고, 과일들도 다 가격을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안내판을 보면, 만약 정해진 상품보다 더 많이 팔거나, 규정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팔 경우 국가에서 몰수해서 국영상점에 넘긴다고 씌어있다.

순천시 녀맹회의에서는 “평양은 상점들에 상품이 차고 넘친다. 장마당 값보다 훨씬 눅다(싸다). 강성대국의 령마루에 올라서는 이때에 모두 상품들을 상점들에 넘기자”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회의에 참가했던 한명순(40대)씨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다 코웃음 쳤다. 장마당에서 이것도 못 팔게 하고, 저것도 못 팔게 하고 다 못 팔게 하면 어쩌자는가. 다 집에서 몰래 파는데. 집에서 팔다나니 사고 싶은 사람들은 값을 깎지도 못하고, 흥정도 못하고, 여러 가지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고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다.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단속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민들, 장사 안 돼 아우성

전국적으로 어느 시장에 가든지, 주민들은 장사가 안 돼 아우성이다. 장사를 할 수 있는 물품이 대폭 제한되는 바람에 돈을 벌지 못하는 상인들이 쌀, 옥수수 등 기본 식량 사기를 주저하는 까닭에 전체적으로 시장이 얼어붙은 모양새다. 평안남도 남포 시장에서 신발을 파는 장영숙(40대)씨는 “장사가 안 된다. 일체 상품들을 다 검사한다. 중국 표 딱지(상표) 붙은 것도 팔지 못하게 회수하니까 뭐 해먹을 게 없다”고 말했다. 또 쌀 가격이 크게 올라가지 않는데도, 순 입쌀밥 먹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시장 쌀 가격은 전국적으로 대동소이하게 1,700원 선에서, 옥수수는 700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남포에 사는 정만호(40대)씨는 “백성들은 배급이라는 말도 잊어버렸는데 간부들은 아직도 국정 가격으로 타 먹고 있다. 입쌀이 시장에서 키로당 1,700원인데 국정가격은 키로당 45원, 옥수수는 750원인데 국정 가격은 28원, 이렇게 눅은 가격으로 배급을 타먹는다. 이걸 다시 장마당에 비싸게 내다 파니, 이래저래 간부들만 살기 좋게 만들고, 백성들은 죽어라 고생해도 한 달에 옥수수밥 한 번 먹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 식량소식

정주 산골, 고구마로 끼니 연명

심영희(가명, 40대)씨는 얼마 전만 해도 어엿한 평양 시민이었다. 중앙당 간부였던 남편이 검열에 걸리기 전까지는 집에 6개월 식량을 쌓아두고 살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다. 남편은 교화소에 가고, 심씨는 아직 장가가지 않은 시동생과 시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자녀와 함께 평안북도 정주시 산골로 추방됐다. 심씨가 들어간 곳은 약 70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마을이다. 70여 세대 중 고향이 원래 이 곳인 세대는 5세대도 채 안 된다. 나머지는 다들 심씨처럼 추방돼 들어온 세대들이다. 심심산골이다 보니 먹는 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다. 죽물을 먹는 집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삶은 고구마 몇 알로 끼니를 때우는 집들도 있다. 심씨는 이 사실을 알고 “정말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고 처음 받았던 충격을 얘기했다. “온 식구가 나무 지게를 지고 한 곁만 올라가면 한 가득 해올 수 있어 땔감 걱정은 없다”며, 땔감 한 단에 고구마 1kg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더 이상 입쌀을 먹지 못하고 고구마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현실은 곧 적응될 거라고 말했다. 심씨에게 더 큰 걱정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였다. 평양에서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온 큰 애는 아직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 “교복이랑 가방, 학용품, 신발 이런 게 너무 비싸서 못 산다. 돈이 나올 데가 없지 않나. 우리 애만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사는 애들 태반이 학교에 못 가고 있다”고 했다. 아직 돈 벌 방법이 없어 뾰족한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아이들 학교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교화소에 간 남편이 부디 몸 보전하고 살아있어 줘서 꼭 다시 만나는 것”이라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책제철기업소, 3월 배급 없어

함경북도 청진 김책제철기업소는 3월에 배급을 주지 못하고 있다. 지난 달 2.16 명절을 맞아 노동자들에게 15일 분량으로 밀가루와 옥수수를 준 게 올해 유일한 배급이다. 이 때 급수가 높고, 결근을 한 번도 안한 ‘만출근’ 노동자들은 밀가루 3.5kg와 통옥수수 3.5kg를 받았다. 김책제철소 노동자들은 3월 초 현재 콩 두박 사먹기도 힘들어하는 집들이 많다고 말한다. 정진성(30대)씨는 “어느 집이나 거의 옥수수 국수로 세 끼 사는 집이 많고, 콩 두박에 옥수수 가루 섞어 먹는 가정이 절반 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필중(40대)씨도, “정세가 긴장하다고 훈련에 내몰지, 주는 건 없지, 요즘은 두박 사먹기도 바쁘다”고 말했다.

회령, 3월 상순 옥수수 7.2kg 배급

회령시는 3월 상순 배급으로 세대주에게 통옥수수 7.2kg를 공급했다. 또 부양여성(주부)들에게는 옥수수를 kg당 340원에 살 수 있게 했다. 시장에서는 통옥수수가 kg당 600원에 판매되고 있어 260원 싸게 살 수 있다. 단 한 세대 당 최대 5kg까지만 살 수 있다. 원래 통옥수수를 주려면 수분을 말려야 한다. 말린 다음 정미소에 가서 잘게 쪼갠 뒤 배급소에서 공급해주게 돼있다. 그런데 전력부족으로 정미가 잘 안되는데다, 급히 수매할 경우 수분이 많은 상태에서 배급소에 보내게 된다. 수분 무게를 고려하지 않고 배급을 주기 때문에 자연히 배급량은 원래보다 줄어든다. 또 계량을 잘 못하거나 운반하는 과정에 감모(부족)분이 발생한다. 배급소에서는 감모분을 쓸데없이 높게 잡아 주민들의 배급량을 줄인다. 이번에 회령에서는 이런 식으로 약 600kg의 식량을 떼어 배급소 직원들끼리 나눠가졌다.

평양, 4월부터 식량배급 절반 감량 예고

평양시 중심구역의 4-5월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의 한 간부는 “현재 각 시, 군적으로 배급을 해주는 지방은 평양시와 회령시다. 평양시는 이제까지 중심구역에 배급해주었는데, 4월부터는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량정부와 식량 취급 일꾼들이 몇 차례에 걸쳐 회의를 했으나, 현재로선 식량 해결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는 “외국에서 무역으로 들여올 만한 데도 없다”고 했다. 중앙당 간부들은 평양시 중심구역 세대들만이라도 배급을 미루지 말고, 어느 정도 식량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평양시 인민위원회 량정부에서는 작년에 생산된 알곡 중 여유분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평양 량정부 부원들은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알곡 생산 수확고가 높은 지역으로 집계된 곳에 식량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확인 차 내려가 보기도 했다.

■ 경제활동

일부 생계곤란 40대 미만 여성 장사 허용

함경북도 청진 등지에서는 젊은 여성들 중 생계가 곤란한 여성들에게 조심스레 장사를 허용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간부는 “젊은 여자들이 시장에 못 나가면 굶어죽는다고 (도당에) 무수히 제기가 들어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간부들이 이런 여성들의 집을 방문해 “시부모를 모시고 힘들게 사는 여자들, 남편들이 대학생이어서 로임이나 배급을 기대할 수 없는 여자들, 그 외 여자가 시장에 나가 벌어야만 살 수 있는 집들”을 확인해 일부 장사를 허용했다고 한다. 이에 홀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젊은 여성들은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됐다며 반가워했다.

■ 정치생활

청진 수산사업소 노동자들, 백두산 건설 돌격대 도주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수산사업소 노동자들이 백두산돌격대에 동원됐다가 4일 만에 도주했다. 수산관리일꾼들은 거금을 들여 해삼양식장을 만들었으나, 작년 한 해 생산량이 200kg도 안 돼 실적이 매우 저조했다. 수산사업소 당위원회에서는 지난 2월 27일, 해삼양식에 필요한 사양공들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을 모두 백두산 돌격대로 보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일이 너무 힘들다며, 백두산 건설 현장에서 며칠 못 버티고 대거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에 수산사업소 관리위원장과 당 비서는 상급부문에 불려가 비판을 받고, 사업 능력 부족으로 사업 정지 처벌 및 당 책벌을 받았다.

청단군, 고기잡이배 월남 의심받아 고초

지난 달 10일, 황해남도 청단군에서는 고기잡이배가 공해 부근까지 나갔다가 해군 경비정에 붙잡혔다. 이 배는 4군단 산하 외화벌이 기지 수산사업소의 부업선이었다. 월남을 시도한 것으로 간주돼 선장과 선원 전원이 즉각 체포됐다. 4군단 보위부에서 이 사건을 취급했다. 월남을 기도했는지 여부에 대한 예심 도중 선원 한 명이 심한 매질로 사망하는 등 취조가 매우 혹독하게 이뤄졌다. 3월 초 현재 선원 6명은 석방되고,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 3명은 계속 취조를 받고 있다.

“전국에 회령시를 본보기로 삼으라”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2월 24일, 회령시를 현지 지도한 뒤 “이제껏 전국 각지를 사찰한 데서 회령시가 제일 잘 꾸렸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곧바로 “전국에 회령시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중앙당의 한 간부에 따르면,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자강도 도당책임비서 연형묵이 일했던 때보다 낫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했다. 이에 따라 8일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회가 끝나자마 전국 각지에서 각 시, 군 책임일꾼들이 참관차 회령시에 들어가고 있다. 회령시당은 긴급히 일선 도로가에 있는 살림집과 아파트 중 낡은 것들은 다시 보수하고, 건물 도색을 새로 하기로 했다. 이번 새로 꾸리기 분공(分工, 개개인에게 할당하는 업무)을 받은 각 동사무소 사무장들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주민들을 동원해 청소를 실시하고 있다.

‘인공위성’ 발사 앞두고 내부 정세 긴장

북한 당국은 ‘인공위성’ 발사를 앞두고, 전국 시, 군당 간부들에게 ‘긴장된 정세’ 사항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우리 공화국의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해 미제와 남조선, 일본 등 일부 반동들이 대단히 신경을 쓰고 시비질을 하고 있다. 무수단에서 발사하는 인공위성을 적대국들이 방해노릇을 할 경우 우리도 가만히 안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인공위성 발사 관련 전국적으로 내부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노농적위대는 물론이고, 교도대, 붉은 청년근위대까지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남자들의 경우 ‘려행증’을 내주지 않고 있으며, 제대하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든 이동을 금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인민군들의 외출이 정지된 상태다. 한편 남북한간 통신선을 차단하겠다는, 3월 9일 인민군 총참모부 성명 발표는 TV로 방영돼 주민들에게도 알려졌다. 평성에 사는 김광민(40대)씨는 “전쟁 전야 같다”는 말로 긴장된 상태를 전했다.

■ 사회

말 한 마디 잘못으로 가족 풍비박산

함경남도 허천군 허천읍에 사는 강봉림은 말 한 마디 잘못 한 바람에 가정이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못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 우에 것들은 잘 먹으니 아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 하는지 알게 뭐냐. 세상이 다 뒤집어져야 우리도 살 구멍이 보일 거다. 하루 살아도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사람 사는 보람이지. 다 굶어 죽는 형편에 언제 죽겠는지 알게 뭐야”등 신세한탄을 했다. 이 말이 보안당국에 들어가 ‘말반동’으로 붙잡히게 됐다. 강씨가 끌려간 후 그의 아내는 집을 나갔다. 늙은 아버지는 자식을 걱정하며 세상을 원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린 자녀들은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떠돌아다니다가 올 겨울 배고픔과 추위에 떨다 죽고 말았다. 강씨는 아직 자기 식구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온 식구가 기차역 노숙자 생활

강원도 원산 역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꽃제비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온 가족이 철도역에 나앉아 있는 모습도 가끔 만나게 된다. 한석기(40)씨도 가족들과 함께 역에서 구걸해 먹고 산다. 한석기(46세)씨는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왔다고 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 7월 6일 차량공장에서 10년 넘게 노동자 생활을 했던 그가 꽃제비가 된 건 작년부터라고 했다. 다음은 그의 말을 정리한 것이다.

처음엔 그런대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2006년인가 부터 생활이 곤란해졌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때는 굶으면서도 공장에 출근했었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먹을 날이 계속 없자’(굶는 날이 계속 되자) 더 공장을 다니지 못하고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금을 채취하고 나무도 팔았지만, 잘 되지 않아 장사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장사라고 해야 주인 따라다니며 무거운 짐을 대신 날라주는 일이었다. 강원도 세포에 가서 옥수수를 가져다 북쪽에 가서 팔고, 북쪽의 수산물을 가져다 평안북도 신의주에 가져다 파는 식이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리득금이 좀 생기는가 하면, 어떤 날은 거꾸로 손해가 나기도 했다. 너무 멀리 다녀서 돈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지방에서 나는 물건을 넘겨받아 가까운 거리에 가져다주는 장사를 부지런히 다녔다. 이렇게 해도 이익이 얼마 되지 않았다.

다음엔 처와 둘이서 제각기 장사를 다녔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수백 명이 저마다 유동하는 형편이라 이것도 잘 되지 않았다. 해서 단천시에 있는 형님네 집이요,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처갓집이요 어디든 할 것 없이 빌어먹으려 다녔다. 이것도 한 두 번이지, 어떻게 계속 우리를 도와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작년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극악한 해였다. 도저히 어떻게 버텨볼 재간이 없을 만큼 식량 구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공장에 다녔던 동무들 중에는 작년 여름을 못 버티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도 여럿 됐다. 장사를 해서 이문이 남는 게 아니라 손해만 보게 되자, 온 식구를 데리고 아예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역에서 역으로 다니다가 여기 원산까지 찾아오게 됐다. 손님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빌어먹으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도 단속이 심해서 얼마나 더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보안원들이 쫓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서 생활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지, 좋은 날은 올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사는 게 일이다. 처와 두 딸한테 미안할 뿐이다.

죽기만 기다리는 노인들

함경남도 단천시 복천동에 사는 리재옥(70대) 할머니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 남편을 먼저 저 세상에 떠나보냈다. 아들은 군대에 가고, 두 딸은 다 출가해 혼자 살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불편한 몸으로 뙈기밭에 이것저것 심어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몸이 부쩍 말을 듣지 않았다. 걷기도 불편할 정도가 되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큰 딸을 겨우 찾아갔으나 며칠도 못 있고 돌아왔다. 또 얼마 있다가 둘째 딸 집에 갔지만, 역시 그 곳에서도 오래 못 있고 돌아왔다. 두 집 모두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손자놈들이 겨죽을 먹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말없이 나와 버렸다고 했다. 지팡이 하나에 겨우 의지해 매일 이 집, 저 집 걸식 다니며 돌아다니다보니 영양실조가 점점 심해졌다.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인민반장이 통옥수수 몇 키로 가지고 한 번 와본 후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무도 찾아보지 않아 할머니는 집에 가만히 누워 죽기만을 기다리는 처지다.

단천 내문동에 사는 조점순(70대) 할머니도 사정이 비슷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혼자 생활하는데 국가에서 돌봐주지 않아 날품팔이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연세가 점점 많아지니 하는 수 없이 빌어먹으면서 목숨을 유지하다가, 작년에는 몸이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됐다. 매일 한숨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이가 없다. 모두 자기 생활도 곤란한터라 할머니를 돌봐주지 못했다. 그렇게 혼자 집에서 누워 지내던 할머니는 끝내 굶주리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이웃들은 “로인 한 분도 국가에서 돌봐주지 못하니,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됐는 가”라며 안타까워했다.

■ 여성/어린이/교육

정신 나간 아버지 모시고 사는 효자 꽃제비 3형제

김동환(12세), 동혁(11세), 동철(8세) 형제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효자 꽃제비로 소문나있다. 그 집 사정을 잘 아는 인민반장은 아이들이 하는 짓이 기특해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인민반장이 들려준 사연은 이렇다.

동환이 아버지는 가성소다 공장 로동자였고, 어머니는 제염소 로동자였다. 할머니가 있었는데 연세가 많아 길거리에서 소소한 장사를 하며 집안 뒷바라지를 했다. 아이들은 다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2007년도인가? 그 때부터 그 집 생활이 곤란해졌던 것 같다. 세대주와 그 처는 공장에 나가지 못하고 품팔이를 하면서 가정을 겨우 유지해갔다. 그것도 잠시, 작년 5-6월에는 곤란이 더 극심해졌다. 세대주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고, 여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로친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쇠약해지기 시작해 끝내 작년 7월 초에 세상을 떠났다. 애 엄마도 영양실조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 지냈다. 세대주가 처를 살려보겠다고 갖은 고생을 다 했다. 그 때 우리 인민반에서도 옥수수 몇 키로 모아서 주고 했다. 그렇지만 돈이 없으니 약을 제대로 구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여자가 오래 못 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슨 수를 다 써도 살려내지도 못하고, 그 집은 빚만 잔뜩 지고 빈손에 나앉게 됐다. 이리하여 삼형제는 아예 학교도 나가지 못했다. 제 아버지가 구해온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다가 큰 형 동환이가 “아버지가 구해온 것만 기다리면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라면서 두 동생을 데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기 가서 빌어먹고 저기 가서 빌어먹으며, 하루에도 몇 십리씩 걸어 다니며 생활했다. 나중에 애들한테 들은 얘기지만, 작년 겨울에는 기차 빵통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찾아 헤매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버지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집에 안 가고 자기네끼리 빌어먹으며 살았다. 그러던 중 새해 들어서 우연히 저희들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집에 데려왔다고 한다. 지난 설 명절 때 그 집을 찾아가보니, 애들이 제 정신 아닌 아버지를 앉혀 놓고, 명절음식이랍시고 구해온 것들을 제 아버지에게 떠먹여주고 있었다. 그걸 보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인민반에서 모아준 헌옷과 옥수수 몇 키로를 주니까 애들이 서럽게 울었다. 그 통에 나까지 기껏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돌아왔다. 아직 학교에 다녀야할 어린 아이들이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도 합심해서 제 아버지를 보살피는 걸 보고 저마다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다.

엄마는 집 나가고, 아버지는 죽고, 오빠도 집 나가

서효림(9세)양은 오늘도 할머니와 장터를 돌아다녔다. 작년 연말에 집을 나간 오빠(장선(11))를 찾기 위해서다. 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작년 12월 연말에 할머니 집에 왔다가 며칠 만에 집을 나갔다. 어디서 굶어죽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할머니와 함께 오빠를 지금껏 찾아다니고 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할머니에 따르면, 작년 생활난이 전례 없이 가혹해지면서 생각다 못해 효림이 어머니가 멀리 장사하러 간다고 나갔다고 한다. 그 뒤로 아무 소식이 없었다. 효림 양은 장사한다고 집을 나간 엄마가 원망스럽지만 보고 싶다고 했다. 함경남도 리원군 채석사업소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자기는 굶으면서도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나무를 해다 팔거나, 바닷가에 나가 바다풀도 뜯었다. 그렇지만 작년 춘궁기는 그 어느 해보다 가혹했다. 너무 힘이 들고 견디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딸 효림양만 홀로 계신 할머니에게 맡겼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겨울이 되자 오랫동안 영양실조 상태에서 추위에 떨며 지내다 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약 한 첩 쓸 돈이 없어 병을 키우다가 12월 20일 길거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혼자 남은 장선 군은 여동생이 있는 할머니 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할머니 집에도 먹을 게 변변하지 못했다. 결국 장선 군은 한 입이라도 덜어야 한다며 혼자 집을 나갔다. 효림 양은 날마다 죽만 먹어도 좋으니, 오빠랑 할머니랑 같이 살고 싶다며 오늘도 오빠를 애타게 찾고 있다.

“회령 김기송제1중학교, 전국의 본보기”로 삼으라지만

교육성은 각 지역 교육당국에 ‘회령시 김기송제1중학교를 전국의 본보기로 내세울 데 대한’ 지침을 내렸다. 중앙당의 한 간부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 김기송제1중학교를 둘러본 김위원장이 매우 흡족함을 표시한 데 이어 이 같은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자강도 강계시제1중학교보다 낫다”는 평가에 따라, 전국 교육성 간부들은 김기송제1중학교를 참관하기로 했다. 평안남도 중학교 교장과 부교장(교감)들이 지난 3월 17일 참관했고, 함경북도 내 다른 시, 군 지역에서도 15일, 17일 연이어 이 학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의 교육 설비와 기자재 등을 둘러본 교육부 일꾼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일반적으로 주민들의 생활 형편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 정도 교육 수준을 맞추는 건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간부는 “김기송제1중학교가 꾸린 것 중에 60% 이상이 학생들한테 세외부담으로 거둔 거라고 들었다. 나머지를 시에서 단속한 시장물품을 판돈으로 교육 설비를 샀다고 하는데, 이건 제일 잘 사는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 가능한 일이다. 평양이 아닌 이상 지방에서, 그것도 1중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들은 감히 생각도 못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평안남도에서 방문한 한 일꾼은 “본보기로 삼는 것은 좋으나, 어떻게 우리 실정에 맞게 할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이라고 말해 근심하는 모습이었다.

■ 사건사고

회령 금광산, 보안성 단련대생들 잇따라 안전사고

함경북도 회령 창두대흥관리국에서 맡은 금광산에서 잇따라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이 광산은 광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들도 종종 안전사고가 날만큼 위험한 곳이다. 광산 일을 처음 해보는 보안성 단련대의 단련대생들이 산 경사가 45도 가까운 곳에서 갱 입구를 뚫는 작업에 동원돼 사고 위험이 더욱 높았다. 지난 3월 10일에는 19살 여성이 갱 입구를 파는 작업 도중에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를 맞고 쓰러졌다. 단련대생들에게는 안전모도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15일 오후에는 갱에 동발목을 세우는 작업을 하던 도중 2미터 구간이 붕괴돼 남자 단련대생 2명이 깔렸다. 피해자들은 팔다리가 부러져 급히 대형 화물차에 실려 가까운 병원에 호송됐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의식을 찾지 못해 다시 시 인민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고 목격자들은 창두 금광산 간부들에 대해 말들이 많다. 창두 금광산에서 일하는 한 40대 광부는 “창두 금광산 관리부장과 초급당 서기장 잘못이다. 광산은 경험이 풍부한 광산 로동자들더러 갱초기 작업을 시켜야 한다. 이 일만 전문으로 해 온 우리들도 얼마나 조심해서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범죄를 지은 사람들을 아무 준비 없이 강제로 내몰아 일을 시키니 사고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다. 며칠 사이에 젊은 청년 3명을 종신 불구자로 만들었으니 이게 잘하는 짓이냐”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 논평

주민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전국적으로 장사가 안 돼 아우성이라고 한다. 식량 값은 크게 오르지 않는데도 사먹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춘래불사춘, 북한 주민들의 체감 온도는 아직 영하에 머무르고 있다.

장사가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주민에 대한 이동 통제를 들 수 있다. 그동안에도 이동이 자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여기에 낙후한 교통수단과 체계,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여행 경비까지 더 하면 사실 이곳저곳 여유 있게 다닐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3월 8일에 실시된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 선거를 앞두고 전 주민들의 타지 이동이 철저히 단속됐다. 장사란 물건이든 돈이든 사람이든 돌고 돌아야 굴러가는 법인데, 철저하게 막아놓으니 얼어붙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둘째, 위의 연장선상에서 현재 주민들에게 돈이 없다. 일부 돈주를 제외하고, 농민과 일반 노동자들은 돈 나올 데가 없다. 농민들은 1년 현금 분배를 받아봐야 2-3천원 수준이다. 이걸로는 콩기름 1kg(5,500원) 사기도 어렵다. 식량을 팔아서 그 돈으로 다른 생필품을 사야 하는데 식량이 안 팔린다. 도시 노동자들이 식량을 안 사기 때문이다. 도시 노동자 세대는 많은 이들이 장사로 먹고 산다. 그런데 이번에 교통 통제가 워낙 강력하다보니 물류가 유통되지 못했다. 게다가 장사 가능한 물품이 대폭 제한된 것도 상황을 어렵게 했다. 식량 값이 오르지 않는데도 사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시장은 아직 활기를 못 찾고 있다. 북한 당국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시장 단속을 다시 천명했다. 전국적으로 배급이 되는 도시는 평양과 회령뿐이다. 평양 중심 구역조차 4월부터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한다. 그 외 지역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을 다시 통제하려는 것은 시의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대안을 마련한 뒤에 시장 통제에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실제 통제 효과가 별로 없는데도 번번이 단속에 나서는 것은 주민들의 생계유지를 어렵게 만들고, 당에 대한 신뢰감만 떨어뜨릴 뿐이다. 먹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 한시적이나마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생계가 매우 곤란한 젊은 여성들에게 장사를 허용하는 현상이 조심스레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며 기쁘게 환영할 일이다. 당장 하루 한 끼니가 어려운 취약계층 여성들만이라도 이렇게 살아갈 숨통을 터줘야 한다. 어찌됐든 장마당이 살아야 주민들도 살아갈 수 있다. 종합시장의 일부 폐단을 이유로, 순기능까지 포기하기에는 주민들의 생존 문제가 엄중하다. 주민들이 하루빨리 따뜻한 봄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집중탐구

평양통신 – 평양 아줌마의 농촌 이주 이야기

평양 아줌마의 농촌 이주 이야기,“식량 분배 준다 해서 마대 줬더니 속았네”

작년 가을에 온 식구가 이곳 평안남도 성천군으로 오게 됐다. 말이 이주지 사실 추방이다. 추방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앞이 캄캄했다. ‘이제 죽었구나!’, 이 생각만 났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에서만 살았다. 대학교까지 줄곧 공부도 잘했다. 앞으로도 평생 평양을 떠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세대주가 무역일하다 뭣 때문인지 추방령을 당했다. 나가라니 나갈 수밖에. 그래도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데 정말 죽기야 하겠느냐, 이악하게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그것도 잠시, 마을에 도착하니 하루하루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얘기해보겠다.

가을걷이 전이었다. 포전마다 예상 수확고를 판정한 결과 알곡 소출이 괜찮다고 했다. 군량미로 국가 알곡 수매 계획을 내고도 량곡이 여유가 있다고 했다. 여유분을 농장원들에게 분배해주겠다고 발표를 해 농민들이 너무 기뻐 열심히 가을걷이하러 다녔다.

밤참으로 햅쌀밥을 한 그릇씩 주니 다들 이게 웬일이냐며 더 열성을 내며 일했다. 나야 평양에서 입쌀밥만 먹고 살았기에 입쌀밥 한 그릇이 그렇게 대단한지 몰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지난봄에 여기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 한다. 식구들 중에 죽은 사람이 한 둘 없는 집이 없다고도 했다. 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사는 모양을 보니 옥수수밥은커녕 죽이나 제대로 끓여먹고 사는지 모를 정도로 가난해보였다. 우리도 곧 그 사람들같이 몰골이 우습게 변하겠지. 하여간 이밥 한 번 먹기 힘든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 그런지 밤참 하나에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탈곡할 때부터 군인들이 들어왔다. 탈곡을 우리(농민)들과 같이 밤낮으로 열심히 하기에 처음에는 지원 나왔나보다 했다. 그런데 알곡 마대가 쌓여가자 어느 날 갑자기 군대 차들이 들이닥쳐 모조리 실어가 버렸다. 올 봄 농사철에 식량이 떨어지면 농민들이 일하러 안 나오니까 좀 나눠주면서 일을 시키려고 작업반장이 감춰놓은 것까지 다 들춰내 가져가 버렸다. 놀랍기도 하고 원래 이런 건가, 나만 몰랐던 건가 싶었다.

며칠 후 우리 세 식구에게 두 달 배분으로 벼를 98kg씩 준다며, 50kg짜리 마대를 2개씩 내라고 했다.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한 번도 안 쓴 새 마대를 내려고 했다. 그랬더니 옆집 아줌마가 “왜 새 것을 내는가? 낡은 거 내라”고 했다.

“진짜로 주는 거 아닌가?”

“(분배 준다는 거) 다 거짓말이다”

그 아줌마 말에 낡은 마대를 냈다. 설마 했더니, 진짜로 마대 낸 지가 언젠데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더니 이번에 썩은 옥수수로 만든 누른 국수 한 근씩 주고, 배분을 대체한다고 하더라. 너무 기가 막혀서 옆집 아줌마한테 그랬다.

“왜 다들 항의를 못하는가?”

그 아줌마, 눈이 동그래져서

“누구에게? 어떻게? 야야, 말조심하라. 그러다 잡혀갈라” 그런다.

그 말 듣고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아니 이게 현대판 노예들이지 뭔가.

놀랄 일이 또 있다. 작년 현금 분배 총화를 한다고 하기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얼마나 받았냐고 물어봤다. 그나마 잘 받은 집이, 일년 분배에서 공제할 것 다 공제하고 2,800원이라고 했다. 다른 집은 아예 말을 꺼내지도 말란다.

“미누스(마이너스)지 미누스. 더 말 해 뭣하갔나. 아야 말 하지 말라”

“그럼 돈은 어디서 나서 기름, 비누, 신발, 성냥 이런 것들 사는가?”

“옥수수 바꾸디 않나. 지금은 입에 넣을 옥수수가 없어 궤짝 하나, 이불 한 채 있으면 됐디. 장판 도배도 못하고 산다”

이밖에도 평양에 있을 때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여기에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막내딸이 유치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한 번 가봤다. 애가 용변이 급하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닦을 위생종이(화장지)가 없더라. 뭘로 닦는지 아나? 옥수수 송치로 닦는다. 눈이 딱 감겨 말이 안 나왔다. 우리 애는 싫다고 징징 우는데 괜히 애한테 화가 나서 궁둥이를 때려주고 말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작업반장이 십 만원을 급히 꿔달라고 했다. 빌려주면 옥수수로 200kg를 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기에, 작업반장씩이나 돼서 거짓말 하겠나 싶어 빌려줬다. 아무리 추방된 신세라고 해도 그 정도 돈은 있었다. 너무 순진했다. 나중에 갚아준 건 옥수수 100kg뿐이었다. 아무리 싸워봤자 더는 현물이 없다는데 어쩌랴. 우리 세 식구 햇곡식 날 때까지 적어도 300kg는 있어야 하는데 야단이다. 평양에 살 때는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일없었는데, 여기 오니 허기져 죽겠다. 농장 가서 일해야지, 물 길러가야지, 땔감 나무 하러 가야지, 하루 종일 움직이니 배가 많이 고프다.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여기는 춘궁기가 가장 무섭다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식량이 여유가 있어도 절대 배부르게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아끼고 또 아껴 먹어야 한다고 말해줬다. 우리도 돈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고 해서 입쌀밥 먹는 건 꿈도 안 꾼다. 그래도 아직은 다른 사람들 먹는 것처럼은 못 먹겠다. 다른 집들을 보면, 하루에 두 끼니는 옥수수를 갈아서 죽을 쒀먹고, 나머지 한 끼니는 삶은 감자 서너 개로 대충 때운다.

이렇게 가난한 마을에도 그 놈의 도적들은 어찌 또 그리 많은지. 특히 요즘에 사금을 캐거나 화목(땔감나무)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하루는 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먹으려고 아껴놓은 삶은 감자 몇 알과 옥수수 죽을 도적맞았다고 한다. 강아지 두 마리 먹이려고 말려놓은 시래기까지 싹쓸이해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 너머에 영양실조 군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는데, 그들 소행이 아니냐고 수군거린다. 남의 일인 줄 알았더니 우리 집도 지난달에 털렸다. 뭐 옥수수쌀을 가져간 거야 이해할 수 있겠는데, 부엌 가마까지 들고 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무 기가 막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하루하루가 충격의 나날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 공화국은 ‘평양공화국’이라고 했는지 매일 느끼고 있다. 중구역에 사는 언니에게 돈 좀 부쳐달라면서 편지를 썼다. “언니, 평양에서 사는 걸 고마워 하라요. 절대 나같이 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거기 있으라 말입니다.” 어쨌거나 살긴 살아야겠는데, 살아남는 게 참으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