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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00호

■ 시선집중

자원활동가 기고 – 북한주민들의 출렁이는 삶을 그대로 전하는 ‘오늘의북한소식’

[자원활동가 기고] 북한주민들의 출렁이는 삶을 그대로 전하는 ‘오늘의 북한소식’

정상희(좋은벗들 미국 지부, ‘North Korea Today’ 영역 자원활동가)

2004년 9월, 창간준비 1호가 발행된 이래로 6년 반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답답한 북한 소식들. 늘 배고프고, 늘 고통 받고, 늘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소식들은 볼 때마다 읽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언제나 벼랑 끝의 끝에 내몰려 살고 있는 것 같은 북한 주민 소식들. 이렇게 가다간 곧 크게 무슨 일 나지 싶어, 내심 어떤 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기대하던 마음은 끝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주저앉게 된다. 이번 주도 또 굶는다는 소식이다. 아, 또 그 소리, 똑같은 소리. 그런데 정말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북한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나? 그간 아무 일도 없이, 북한은 언제나 똑같은 상황이었나? 주민들은 변함없이 그대로 굶고만 있었나?

내가 (사)좋은벗들에서 자원봉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07년 2월이었다. 그 당시 내게 주어진 임무는 그간 발행되어 온 을 모두 취합하여 기사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를 편집하는 작업이었다. 이전에는 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일반 언론에서 북한 소식을 전하며 좋은벗들을 인용할 때 나오는 한 줄 정도의 소식만 알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통합본을 만들려니, 기사를 주제별로 분류하기 위해 그간 발표된 모든 기사를 다 읽어야 했다. 당시 2006년 북한의 큰물 피해 관련 기사가 많았기 때문에, 수해소식, 전염병 소식 등을 따로 분류했고, 그 외에 정치, 경제, 사회, 여성, 교육, 농업, 주민생활, 식량소식, 꽃제비 소식, 사건사고 등의 주제별로 기사들을 정리했다.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거의 그대로 전달되는 생생한 소식들. 북한 사회에서 관찰되는 미묘한 변화의 바람과 주민들의 솔직한 생각들을 볼 수 있어 신선했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이 극심한 고통의 절규와 다름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후로는 을 매주 받아보며 읽어 왔고, 매 호마다 반복되는 북한 주민들의 ‘굶어 죽겠다’는 소리가 지겨웠음에도 2009년 중반부터는 영문판 번역 자원봉사를 해 오면서 나는 더더욱 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 경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도 했다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다거나,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보안원들에게 항의를 했다는 흥미진진한 소식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비사그루빠 단속이 극심해지고, 누구나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시장 단속이 강화되고, 남북 관계가 악화되어 식량 지원도 끊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에는 화폐개혁까지 실시되어 그나마 싹이 터 자라나던 북한 주민들의 시장경제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 보면, 권력 승계 업무의 압박과 강성대국을 열겠노라 호언장담을 해 온 2012년이 눈앞에 닥쳐온 상황. 이제 북한 정권은 중요한 광물 자원이나 지리적 자원 (항구 등)까지 모두 중국에 헐값에 내다 팔아서라도 다급히 식량을 구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놀랍게도 그 굳센 자존심에 외부에 정식으로 식량지원 요청까지 했다.

반복되는 식량부족 소식으로 인한 피로감을 제어하고 잘 살펴보면, 그 동안 북한에서는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발간되어 온 지난 6년 6개월간 북한 사회가 요동친 정도를 그래프로 그려 본다면, 강도 8의 지진을 표시하는 지진계의 그래프만큼이나 북한 사회는 내부적으로 여러 충격의 여파로 심하게 출렁여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완강하게 변함이 없는 북한 정권. 그러나 은 그 정권 밑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출렁이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러한 이 이제 400호를 맞는다. 그간 북한 소식을 전하는 다른 매체들이 많아진 만큼, 만의 특성을 잘 살려 남과 북이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와 북한 주민들과의 소통의 끈을 계속 이어 주었으면 한다. 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우리가 북한 주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튼실한 밑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외부 칼럼 – 인도적 대북지원, 새로운 관점으로 뒤집어 보다

[외부 칼럼] 인도적 대북지원, 새로운 관점으로 뒤집어 보다

고경빈(전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 전 하나원장)

분배투명성의 확보와 당국-주민의 분리 전략

북한은 외부의 지원물자를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 빼돌린다고 합니다. 당국만 이롭게 하고 주민에게는 별로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탈북자들도 외부지원 사실은 알고 있지만 대부분 받아보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분배투명성 보장 없는 대북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이어집니다.

투명성을 확실히 담보할 방법이 있나요? 우리가 직접 주민에게 전달하면 안심이 될까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을 겁니다. 국제구호기구 감시단이 현장에서 확인해도 이들이 돌아가면 지원물품을 당국이 도로 가져간다고도 합니다. 그나마 분배확인도 전 지역에서 지속되지 않고 선택적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북한인구 전체를 당국과 주민으로 구분하여 주민에게만 분배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며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당국에 속하며 어디까지를 주민으로 볼지 애매합니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정교하게 모니터링을 강화하더라도 대북 불신이 지속되는 한, 투명성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신뢰가 근거도 없이 갑자기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대북지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국과 주민을 분리하여 접근한다는 전략적 사고를 통해서 투명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투명성이 다소 미흡해도 대북지원이 나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당국과 주민의 분리 접근을 통해서 투명성을 확보할 수는 없어도, 투명성 문제를 통해서 당국과 주민을 분리할 수는 있습니다.

북한의 장마당에서도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쌀 포대를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듯이, 우리의 지원 사실을 알게 된 북한 주민들은 중간에 물자를 착복하는 자기 당국에게 불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불만이 누적되면 이들은 결국 등을 돌릴 것이고 자연스럽게 당국과 분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서울 사는 큰형이 시골의 두 동생에게 선물소포를 보냈는데 둘째가 이를 독식하면 막내의 원망은 궁극적으로 큰형이 아니라 둘째에게 향할 것이며, 큰형에게는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대북지원에 있어서 분배투명성이 확보된다면 더없이 바람직 하지만, 분배투명성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또 다른 중요한 전략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남과 북의 수혜자

북한의 어린이와 임산부 등에게 영양보충용으로 지원한 제주 감귤을 북한당국이 당 간부들에게 생색용으로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귤지원은 헛된 것이며 앞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약속을 위반한 북한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합니다. 제주도민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감귤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이를 통해 이루려던 또 하나의 중요한 정책목표를 망각한 것입니다.

감귤지원은 당초 국내농가 보호차원에서 추진되었습니다. 관광 외에 뚜렷한 산업이 없는 제주도에 감귤농사는 중요한 생업입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을 겪으며 농가를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이에 도민들이 직접 나서 성금으로 감귤을 구입하고 정부는 수송비를 부담하면서 대북지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찾는 민족정서를 북한주민은 제주의 상징인 감귤에서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어지면서 제주도는 남북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과잉 생산 농산물을 출하량 조절차원에서 북한에 지원하려는 지방자치단체에 수송비를 보조하는 것을 제도화합니다. 그동안 당근, 사과, 배, 감자농가가 추가로 혜택을 보았습니다.

대북 쌀 지원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쌀 자급을 이룬 1976년 이후 매년 꾸준히 재고가 쌓여 2000년에는 적정재고의 두 배로 늘어납니다. 국민정서상 이를 사료로 쓰거나 태워버릴 수 없었습니다. 외국에 헐값에 팔거나 내수를 늘리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지만, 술과 과자를 쌀로 만들면서 추가적인 수요창출은 한계상황이며, 국제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없기도 하지만 세계무역체제에서 쌀시장 완전개방시기를 유예 받은 우리는 쌀 수출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대북지원은 민족내부 거래라는 특수성과 인도적 차원의 명분으로 양해를 묵시적으로 구한 것이었습니다. 과잉재고를 처리하지 못하면 쌀값 하락으로 농가가 타격을 받고, 창고를 갑자기 늘리는 것도 곤란한 상황에서 대북지원이 문제의 일부를 해소해 주었습니다.

대북지원으로 쌀 재고가 적정선 범위로 줄어들었으나 대북지원이 중단되면서 2010년에는 다시 역대 최고인 150만 톤에 이르게 됩니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쌀 소비가 매년 2%씩 감소하는 반면, 이중가격제로 생산도 줄지 않아 매년 수요보다 20%가 초과생산 되고, 쌀시장 개방유예의 대가로 매년 수요의 10%를 의무적으로 수입하니 재고량은 전년대비 30%씩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상황입니다.

한반도 현대사와 쌀의 정치경제학

쌀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단순한 식량 이상의 아주 특별한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첫째, 쌀은 우리에게 가난의 숙명을 벗게 해준 기적의 상징입니다. 빈곤과 기아로 허덕이던 시절, 우리는 수년 연구 끝에 1971년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개발하고 1976년에는 꿈같던 쌀 자급을 이룹니다. 농사지어 아이들을 먹일 뿐 아니라 학교도 보내게 되었고 그 아이들이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일꾼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쌀은 대한민국 근본정서와 이어 있고 농민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둘째, 쌀은 남북적대의 현실에서도 서로 인도주의와 동포애를 전해주는 상징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에 쌀 165만 톤을 지원했습니다. 15만 톤은 무상지원이고 150만 톤은 유상으로 주었습니다. 북한은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고 하였고 “인민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제공” 하려한 김일성의 소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북한이 오랜 원수로 싸우던 남한으로부터 쌀을 받는 사실자체가 각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쌀은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상징인 반면, 북한에게 있어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자 실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대북 쌀 지원은 대한민국 성공신화와 북한체제실패를 명료하게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회가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탈북여성의 호소 – 북한 고아원에 맡기고 온 제 아이를 살려 주세요!

[탈북 여성의 호소]

안녕하세요? 저는 북한에서 아기를 고아원에 맡기고 온 한 어머니입니다. 제가 아기를 고아원에 맡길 당시에는 이렇게 긴 이별이 될 줄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당시 저는 허약증에 심한 고열과 물도 못 마시는 못된 병에 걸려 아기를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젖이 마르고 죽 한 그릇 먹일 강냉이도 없어서 18개월 된 아기를 2일 동안 굶기면서, 빈 젖만 물리고 꼼짝 못하고 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러다 둘 다 죽겠다고 하면서 고아원으로 제 아기를 안고 뛰었습니다. 저는 쓰러져서 정신이 혼미해 지는 속에 아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나마 고아원에서는 아기한테만은 먹을 것을 주겠거니 하고 잘 돌봐줄 것이라 믿고 맡길 수가 있었어요. 제가 몸이 좋아지고 경제적인 뭔가를 손에 쥐면 꼭 아기를 찾아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한데 아무리 애써도 저하나 생존하기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많이 아프거든요. 오랫동안 수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멍든 상태예요. 어쩌다 한국 사회에까지 들어와 적응하고 살기에 한계가 있어 죽을 지경이지만, 더 괴로운 것은 아직도 북에 두고 온 아기에게 따뜻한 분유나 밥 한 그릇을 내 손으로 떠먹이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혀, 제가 지금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당장 급한 방법은 아기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저를 받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염치가 없지만, 제발 북한에 두고 온 제 아기도 살려주세요. 북한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으면 제일 먼저 능력 없는 노약자나 아이들이 굶어죽습니다. 또 북한 전국의 탄광이나 광산, 특정 노동자 지구와 교통이 불편해서 들어가기 힘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 받습니다. 지금 4월부터 보리와 감자가 날 때 까지가 제일 많이 굶어 죽습니다. 모쪼록 북한에 많은 식량이 지원되어 고아원의 아이들을 살리고, 교통이 불편 한 시골구석까지 지원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저도 여기서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꼭 은혜 갚겠습니다.

2년 전 북에서 온 리옥화(가명, 40대) 올림

인터뷰 – 북한 간부, 남한의 대북 인도적 지원 논쟁을 말하다

[인터뷰] 북한 간부, 남한의 대북 인도적 지원 논쟁을 말하다

편집자 주.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면 군량미로 전용된다, 3대 세습 선전에 활용될 것이다, 2012년 선전용 비축미로 사용될 것이다”등 대북 식량 지원을 둘러싸고 부정적인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외부에서 제기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 북한 간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동안 북한 식량난 실태를 면밀히 주시해온 좋은벗들에서는 400호 특집을 맞아, 중앙당의 한 간부에게 현재의 식량 실태와 대북지원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 내용은 개인의 견해일 뿐, 일반화시킬 수 없음을 밝혀둔다.

질문: 요즘 북한 정부에서 식량을 지원해달라는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하는 것 같다. 대북 지원을 두고 남한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답변: 해외 주둔 대표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남조선으로 탈북한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국내 주민들 중에 일부가 외부에서 식량을 지원해도 하나도 도움이 안 되고, 백성들에게 차려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식량 지원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고 들었다. 그런 것들이 남조선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면서, 남조선에서는 식량을 우리 조선에 지원해주면 군부에 들어가고, 그것을 군인들이 먹고 힘을 써서 남조선을 공격한다고 하면서 지원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다고 들었다. 일부 그런 현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몇몇 근거에 따라 내놓은 말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억지스러운 논리들이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니 여럿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당신은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그렇다고 내가 지원을 선동하고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 역시 먹고 살 근심은 안 해도 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 굶어죽는 일이 당장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지원해 달라”, “안 주겠다” 이런 시비에 말려들거나 논쟁에 참여하기도 싫다. 지원하고 안하고는 남조선 정부가 결정할 일이고, 지원을 요청할지 말지는 우리 정부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말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남조선 언론들에서 너무 무책임하게 근거 없는 일들을 기사로 내보내는 일이 많은데, 그 기사들만 보면 남조선과 우리 조선이 뭐가 다른지 나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회가 발달하고 문명이 고도로 발전했다는 남조선 사회에서 언론들이 내보내는 기사들을 보면 극영화보다 더하다. 한류, 한류 하던데 극영화를 잘 만들어서 언론들도 기사를 그렇게 잘 꾸며대는가? 나도 우리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지만, 남조선 언론들이 하는 보도를 보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는 다 염치없고 나쁜 괴물들만 사는 데 같고, 백성들은 식인종에 마약쟁이들 같다. 나 같은 사람도 그런 기사들을 보면 자존심이 상한다.

질문: 다시 식량 질문으로 돌아가면, 식량난은 늘 있어왔는데 북한 정부가 요즘처럼 식량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답변: 1990년대 대량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도, 세계에다 특히 한민족인 남조선에 식량구걸을 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정부다. 그런데 요즘 왜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미국과 국제 사회에 식량 원조를 요구하고, 남조선과의 정상회담도 여러 차례 제기를 하겠는가? 한마디로, 국내 식량 사정이 1990년대 말보다 더 험악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에 식량사정을 토로한 적이 지금까지 없었는데, 이제는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식량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소리다. 2008년도부터 농장원들이 식량부족으로 너무 많이 죽어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다. 도시에서 농장원들을 모집하는 일들까지 벌어지는 등 현재 농장원들의 생존환경에 무서운 그림자들이 드리워져있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지원해줄만한 여유 량식도 없고 해서 지난해에는 선군 체계에서 군인들까지 굶겨죽이면서까지 농장원들에게 군량미 중단 등의 혜택을 주는 등 가능한 조치를 다 취했다. 그러나 그런 조치들로는 만성적으로 여러 해 이어진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젠 농민들이 더 죽으면 농사지을 인력도 없어진다. 그렇다고 도시 사람들을 모두 농촌에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도시 기업과 공장들이 현재 운영되는 것이 없어 농장 진출이 가능하지만,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도시 로동자들도 모두 농장원들로 전락할 것이다. 한겨울에도 전국 농장원들의 70%가 언감자 몇 알로 생계유지하고, 풀도 나지 않은 겨울 야산에 나가 풀뿌리를 캐러 다녔다. 식량 배급이 10년 전에 이미 없어진 도시 일반 로동자들은 화폐 개혁으로 직격탄을 맞았으니, 더 말해 뭐 하겠는가. 사정이 어려우니까 체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가 생각한다.

질문: 그러나 대북지원을 해도 북한 정부가 분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식량을 지원해도 주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원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답변: 답답한 이야기다. 한쪽에서는 우리 정부가 통제력을 잃고 곧 망할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분배를 일부러 안하는 것처럼 말한다. 남조선에서 식량을 지원해도 일반 계층에 전달이 잘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 배급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 벌써 10년도 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동안에 끼리끼리 해먹는 게 완전히 굳어졌다. 상부는 상부대로 하부는 하부대로, 각 단위별로 직장별로 힘 있는 데는 힘 있는 데서 우선 해먹게 돼있다. 중앙에서 그것을 시정해보려고 몇 번 검열그루빠를 내려 보내고, 시범으로 몇 사람 목을 날리기도 하지만 그 때 뿐이다. 검열그루빠로 내려간 사람이 거기서 또 얻어먹고 눈감아주는 현실에, 누가 누구를 감시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서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문제가 있다. 배급 체계가 무너져서 분배를 잘 못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곧 붕괴할 거라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야 자유지만, 배급 체계 없이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게 우리 정부 아닌가. 선후관계를 잘 따져서 논리를 만들어도 만들어야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앞에 두고 현실을 억지로 맞춰 나가면 안 된다.

그렇다면 식량지원이 최하층주민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 지 말해보자. 국가에는 돈이 없어도, 외화를 쌓아놓고 사는 당 간부들과 돈주들은 식량 걱정이 없는 상태다. 지금 식량난은 순전히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 그리고 특수부대가 아닌 일반 군대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싶어도 옆으로 새니까 지원을 못해주겠다고 하는데, 정말 분배가 안 되느냐?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실례를 들어보겠다. 남조선 지난 정부에서 수해물자와 긴급재난 물자를 보내준 것은 다 제 지역에 들어갔다. 이것은 내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디로 보내라는 게 명확하게 나오니까 그렇다. 만약에 평안남도 신양군에서 수해가 심하니까 거기에 밀가루 몇 천 톤, 시멘트 몇 톤 긴급 지원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그 지방당 간부들과 협상하면 그 지방에 확실히 들어간다. 문제는 중앙 정부에서 반드시 통전부(통일전선부) 사람들을 거쳐서 만나게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긴다. 통전부나 평양에 있는 중앙 단위들은 자기 밑에 먹여 살릴 수하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디서 뭐 지원을 받으면 자기들 배만 불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당이나 군당같이 지방당들이나 김책제철소다 뭐다 특정 기업소들은 자기들한테 딸린 입들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식량을 지원받고 싶어 하고, 다른 데 안 뺏기려고 한다. 생각해보라. 남포항에 사리원 시당에서 가져갈 식량이 들어온다고 해서 시당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 군부에서 중간에 가로채갈 수가 있겠는가. 시당 사람들이 가만히 놔두겠나? 물론 그 중에서 군부와 협상해서 일부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만, 군부가 다 빼간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사생결단하고 달려들어 다시 뺏어갈 거다. 그만큼 모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처지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가 군대에 간다고 해도 군인들도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고, 우리 자식들이다. 또 간부들이 다 빼돌리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사람들이 많이 먹어봤자 하루 세 끼 먹는다. 나머지는 어차피 시장에 나오게 돼있다. 시장에 나오면 식량 값이 떨어지고, 돈 없는 도시 노동자들이 사먹기가 쉬워진다. “귀하면 비싸고, 흔하면 눅다(싸다)”는 이치는 세 살짜리 아이들도 안다. 식량 값이 떨어져야 주민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왜 이런 도리는 안 따지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남조선에서 청진항과 남포항으로 식량이 들어온다고 남조선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된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실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단지 들어올 거라는 이야기만으로 전국 식량 값이 일제히 떨어졌다. 우리 정부가 정보 통제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그런 소문은 막을 길이 없다. 어디에 쌀 몇 톤이 들어온다고 발표해봐라. 전국 어느 도시에나 당장 그 소문이 돌면서 바로 식량이 풀릴 것이다. 쌀값이 더 비싸질 때 팔려고 안 내놓았던 장사꾼들이 시장에 쌀을 풀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누가 혜택을 보겠는가? 2,000원 줘도 못 사먹는 쌀을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사먹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백성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시장에 쌀이 많이 나오니까 사먹기 편리하다고 좋아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를 생각해야지, 그것 때문에 못 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 차라리 주기 싫다고 하는 게 솔직한 것 같다. 할 말은 더 있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곡산군, 굶주리는 노동자들 증가

황해북도 곡산군 곡산읍 편의봉사관리소에서는 지난 2월 달부터 매달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불러다 강한 비판투쟁을 하고 있다. 비판받는 노동자들의 행색은 척 보기에도 혀를 끌끌 차게 한다. 도대체 음식을 먹으면서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삐쩍 말랐다. 규찰대에 강제로 이끌려나와 자리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남들이 욕을 하던 손가락질을 하든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하다. 머리를 가눌 힘도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고 어딜 보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장기간 무단결근한 노동자들을 보면 하루에 옥수수 1kg도 못 먹는 집들인 경우가 많다. 여자들이 장사를 해서 벌어 먹인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죽 2끼 챙겨먹기도 쉽지 않은 집들이 많다. 무단결근자들을 데려오는 임무를 받은 규찰대원들 말이 도저히 데리고 올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한 규찰대원은 정상철(가명)씨 집에 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집에 들어갔더니 비릿한 악취가 풍겼다. 벌써 한 달 넘게 안 나오고 있는 정상철 로동자를 데리러 간 길이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지저분한 홑이불 하나 깔고 누워있었다. 출근하자고 강제로 어깨를 붙들어 일으켜 세웠는데, 나무토막 드는 것처럼 너무 가벼워서 깜짝 놀랐다. 대체 얼마나 굶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말은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만 끄덕이고는 실제 말은 못했다. 그러다 곧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그 집 안해가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자기 세대주를 해코지라도 할까봐 놀라서 뛰어온 모양이었다. 들어온 여자도 소학생 정도 되는 작은 키에 삐쩍 마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제 남편보다는 힘이 좀 있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울며불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단련대에 보내면 자기 남편은 죽는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했다. 단련대에 보내려는 게 아니고, 직장에 출근을 안 하고 있어서 데리러 온 것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여자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는지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같이 간 동료가 재수 없게 됐다며 강제로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걷는 건 둘째 치고 아무 맥이 없어 바로 서있지도 못했다. 일으켜 세우고 물러나면 곧 주저앉고, 세우고 나면 다시 주저앉았다. 남자 몰골을 보자마자 데려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었기에 옆에서 씩씩 대는 동료를 끌고 그 집을 나왔다.” 한편, 같은 기업소 일군들은 먹는 문제가 나빠졌다고는 해도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잘 먹는다. 5대5밥을 먹지는 못해도, 3대 7 정도로 입쌀과 옥수수를 섞어 먹을 수 있다. 아무리 죽는 소리 해도, 며칠씩 굶고 있는 집들에 비하면 옥수수밥이나마 풍족하게 먹는 일군들은 부자 축에 든다.

가족 단위 꽃제비도 늘어

꽃제비들 중에는 가족 단위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량강도 혜산시 혜탄동 출신의 박영수(가명)씨는 가족과 함께 벌써 3개월 넘게 혜산역과 시장 주위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잠은 역 대합실에서, 낮에는 시장이나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박씨는 딸아이와, 아내는 아들아이와 같이 구걸하러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대합실에서 만나 네 가족이 모여 잔다. 어쩌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화폐개혁 때문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건네준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답변을 더 기다리는 눈치를 챘는지, 말을 좀 더 붙였다. “화폐개혁으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장사할 밑천이 없어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팔다가 계속 굶을 수가 없어 할 수없이 집까지 팔았다. 그게 결국 가족들을 모두 거지 신세로 만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 혼자라면 괜찮은데, 아이들과 안해까지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아무리 간부라도 돈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우리 같은 꽃제비가 될 것이다. 조선 사회는 간부나 돈 많은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씁쓸해 했다.

혜산시 꽃제비 구제소에 자리 없어

제 먹고 살 길이 바빠 다른 데 눈길을 안 주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집밖으로 나서면 안 마주치려고 해야 안 마주칠 수 없는 존재가 꽃제비들이다. 고난의 행군 때부터 워낙 오래 봐 온 탓인지,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꽃제비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으면, 제 가족이 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흠칫 놀라곤 한다는 사람이 간혹 있을 정도다. ‘꽃제비들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확실히 국내 사람들은 아니다. 도처에 있으나 무관심하게 방치되는 존재들, 꽃제비들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량강도 혜산시에도 식량난이 깊어만 가는지, 올해 부쩍 꽃제비들이 늘고 있다. 구제소에 꽃제비들을 더 넣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 주기적으로 꽃제비 단속에 나서는 보안원들조차 “잡아다 주면 뭐하나. 자리가 없는데. 하루가 다르게 매일 늘어나는 게 꽃제비인지라 단속하라고 하면 단속하는 시늉만 할 뿐”이라고 말할 정도다. 요전 날에는 혜산역 대합실에서 붙잡은 20대 남자 꽃제비가 “누구는 꽃제비가 되고 싶어서 됐느냐?”고 소리를 질러서 시끄럽게 구는 게 귀찮아 그냥 놔주었다는 보안원도 있다. 기껏 구제소에 보내봤자 다시 뛰쳐나올 게 뻔한데, 데리고 가는 동안에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 하고, 말썽피우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그에게 꽃제비들은 그저 귀찮은 존재였다. 단속해도 성과도 안 나고, 뇌물도 받아먹을 수 없어 전혀 쓸데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 보안원은 지난 1월과 2월, 두 달 동안 혜산시에서 죽은 꽃제비 수가 40명이 넘었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짐승이 40마리 죽었어도 가여운 마음이 일 법도한데,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꽃제비들이 그렇게 많이 죽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얼어 죽고, 못 먹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고 해 묻는 사람이 멋쩍어져서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생계난에 위험 무릅쓰고 낙태 수술

유산을 시도하는 여성들이 암암리에 늘고 있다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리원시 산과 담당 의사는 산모가 매우 위독한 상황이거나, 태아에 치명적인 장애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 한 유산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유독 작년부터 더 늘고 있다고 했다. 공식 통계가 있다기보다, 자신(의사)들을 몰래 찾아와 수술을 부탁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화폐개혁 이후 생활이 급격히 어려워진 집들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유산을 시도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시장에서 아이를 없애준다고 소문난 약을 구해 과다복용하거나 안면이 있는 의사에게 얼마간 돈을 주고 몰래 시술을 받는다. 병원에서 시술하다가 발각되면 해당 의사는 물론이고 책임일군들까지 교화소로 직행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행해진다.

구천3동에 사는 리은주(가명)씨는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유산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마당에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하나. 어른들도 목숨을 유지하기 힘든 세월이다. 부모가 돈이 있어야 아이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바에는 애초에 낳지 않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잘하는 일”이라며, 아는 사람을 통해 몰래 의사를 찾아갔으나 시술을 거절당했다. 리씨를 만난 여자 의사는 “태아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임신 2-3개월 안에 유산해도 후유증이 큰데, 임신 6개월 넘어서 낙태수술을 하는 것은 여자들에게 해산하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준다. 이미 손발이 다 자라고 사람 형상을 갖추고 태동까지 하는 임신 6개월에 유산하는 것은 절대 쉽게 권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나 이 아주마이(리은주씨)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독한 약을 써도 그렇고, 수술해도 그렇고 뭘 하든 산모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꼭 유산을 할 것”이라며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식량난 세월에 출산은 아이에게 못할 짓”

북한에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 사이에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아이를 낳아서 뭐 하겠는가. 잘 먹이지도 못할 바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황해북도 사리원 서리동에 사는 박정옥(가명)씨는 “배급은 바라지도 않는다. 장사라도 잘 되면 그럭저럭 먹고 살 텐데, 국가에서 화폐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장사 밑천을 다 날려버린 집들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에 사는 스물여덟 살 젊은 주부 리명화(가명)씨는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울먹였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에 애가 덜컥 생겨 어찌어찌 낳기는 했지만 키울 일이 막막하다. 지난 2월, 초산이라 모진 진통 끝에 몸집이 작은 딸아이를 순산했지만, 먹을 것이 없어 두 달째 죽만 먹고 있다고 했다. 박씨의 남편이 직장 동료들에게 옥수수를 꾸어다 두어 차례 옥수수밥을 해준 게, 그가 유일하게 먹은 밥다운 밥이었다. 남편도 굶고 있는 처지에 자기만 밥알을 넘기자니 목에 콱 걸려 제대로 삼키기도 힘들었다고 눈시울을 다시 붉혔다. 박씨는 남편의 만류에도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해산한 지 일주일 만에 길거리로 나섰다.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소리야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젖이 안 나와 배고파 칭얼거리는 갓난아이와 단둘이 집에 누워만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울다가 지쳐 잠든 딸아이를 등에 업고, 파지와 파철, 파비닐(폐비닐) 등을 주워 그날그날 생계를 이어간다. 박씨는 “죽이라도 아무 근심 없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한 끼 먹으면 다음 끼 걱정을 해야 한다. 이런 세월에 아이를 낳았으니, 딸아이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다”며 절망스러워했다.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에 사는 최복순(가명)씨는 산후 4개월이 되도록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에게 죽을 먹이고 있다고 했다. 장사가 좀 잘 되는 날은 입쌀가루라도 구해서 쌀죽을 쑤어 먹이지만, 허탕 치고 돌아온 날은 옥수수죽을 먹이고 있다. 최씨는 “1년도 안 된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도 못하고 죽을 먹이니 아이가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것 같고 자꾸 말라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입쌀가루라도 떨구지 말고 먹여야겠는데, 장사가 안 되니 쌀가루를 구할 데가 없다. 저 어린 것 입에 들어갈 것조차 못 구하는 지금 세월이 원망스럽다. 아이 낳은 것이 후회될 때가 많다”고 괴로워했다.

황주군에서도 요즘 젊은 부부들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세대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황주읍에서 만난 여성들은 “어른들도 먹고 살기 힘든 형편에 아이를 낳으면 최소 1년은 꼼짝 못하고 애를 키워야 하는데, 누가 벌어 먹이겠는가. 아이를 안 낳으려는 사람들 심정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해산한 뒤에도 일을 시키는 당의 처사가 너무 무자비하다고 불만을 당에 돌리는 여성들도 많다. 금순희(가명)씨는 “해산하고 나서 두 달도 안 됐는데, 녀맹에서 왜 총화 하러 나오지 않느냐고 닦달을 하더라. 조직생활에 다 참가하고 과제도 하노라면 산후 조리는 꿈도 못 꾼다. 마을 청소하러 나오라, 길 닦으러 나오라, 파철 걷어오라, 뭐하라 말이 많아서 아주 바빠 죽겠다. 이렇게 시끄럽게 구니 누가 아이를 낳고 싶겠는가?”라고 물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조직 생활에서 배려해주는 것이 없고 모두 참가해야 하니 하는 소리들이다. 당과 녀맹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옥수수도 먹지 못해 헤매는 이 세월에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것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산모에게 배급이라도 주면서 그런 말을 하든지. 아니면 사회동원을 시키지나 말든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금씨는 “콩기름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기름을 짜고 난 콩이라도 구해서 한두달 지탱하는 산모들이 많다.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얼마 없어 이렇게 가다가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자연히 없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싶다”고 우려했다. 한편 전국적으로 신생아들의 사망률도 높아지는데, 의사들은 영양부족 때문이라는 소견을 내리고 있다.

‘북한 식량난 실태와 대북 인도적 지원’

2004년 9월 시작했던 ‘오늘의 북한소식’이 벌써 400호를 맞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서 들여다 보다보니,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7년여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못 먹고 못사는’ 우리 북녘 이웃들의 삶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은 400호를 기념해 ‘북한 식량난 실태와 대북 인도적 지원’이라는 주제로 기사와 칼럼을 묶어보았습니다. 또 똑같은 소리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어쩌겠습니까. 북한 주민들이 가장 어렵다고 절규하고 호소하고 애끓어하는 것이 바로 식량 문제인 것을요. 부디 그 분들의 고통에 더 귀 기울여 주시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400호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분들에게 마음 깊이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 식량소식

곡산군, 굶주리는 노동자들 증가

황해북도 곡산군 곡산읍 편의봉사관리소에서는 지난 2월 달부터 매달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불러다 강한 비판투쟁을 하고 있다. 비판받는 노동자들의 행색은 척 보기에도 혀를 끌끌 차게 한다. 도대체 음식을 먹으면서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삐쩍 말랐다. 규찰대에 강제로 이끌려나와 자리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남들이 욕을 하던 손가락질을 하든 전혀 들리지 않는 듯하다. 머리를 가눌 힘도 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릿하고 어딜 보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장기간 무단결근한 노동자들을 보면 하루에 옥수수 1kg도 못 먹는 집들인 경우가 많다. 여자들이 장사를 해서 벌어 먹인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죽 2끼 챙겨먹기도 쉽지 않은 집들이 많다. 무단결근자들을 데려오는 임무를 받은 규찰대원들 말이 도저히 데리고 올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한 규찰대원은 정상철(가명)씨 집에 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집에 들어갔더니 비릿한 악취가 풍겼다. 벌써 한 달 넘게 안 나오고 있는 정상철 로동자를 데리러 간 길이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지저분한 홑이불 하나 깔고 누워있었다. 출근하자고 강제로 어깨를 붙들어 일으켜 세웠는데, 나무토막 드는 것처럼 너무 가벼워서 깜짝 놀랐다. 대체 얼마나 굶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말은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만 끄덕이고는 실제 말은 못했다. 그러다 곧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그 집 안해가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자기 세대주를 해코지라도 할까봐 놀라서 뛰어온 모양이었다. 들어온 여자도 소학생 정도 되는 작은 키에 삐쩍 마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제 남편보다는 힘이 좀 있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울며불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단련대에 보내면 자기 남편은 죽는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했다. 단련대에 보내려는 게 아니고, 직장에 출근을 안 하고 있어서 데리러 온 것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여자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는지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같이 간 동료가 재수 없게 됐다며 강제로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걷는 건 둘째 치고 아무 맥이 없어 바로 서있지도 못했다. 일으켜 세우고 물러나면 곧 주저앉고, 세우고 나면 다시 주저앉았다. 남자 몰골을 보자마자 데려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었기에 옆에서 씩씩 대는 동료를 끌고 그 집을 나왔다.” 한편, 같은 기업소 일군들은 먹는 문제가 나빠졌다고는 해도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잘 먹는다. 5대5밥을 먹지는 못해도, 3대 7 정도로 입쌀과 옥수수를 섞어 먹을 수 있다. 아무리 죽는 소리 해도, 며칠씩 굶고 있는 집들에 비하면 옥수수밥이나마 풍족하게 먹는 일군들은 부자 축에 든다.

“식량난 세월에 출산은 아이에게 못할 짓”

북한에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 사이에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아이를 낳아서 뭐 하겠는가. 잘 먹이지도 못할 바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황해북도 사리원 서리동에 사는 박정옥(가명)씨는 “배급은 바라지도 않는다. 장사라도 잘 되면 그럭저럭 먹고 살 텐데, 국가에서 화폐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장사 밑천을 다 날려버린 집들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동에 사는 스물여덟 살 젊은 주부 리명화(가명)씨는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울먹였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에 애가 덜컥 생겨 어찌어찌 낳기는 했지만 키울 일이 막막하다. 지난 2월, 초산이라 모진 진통 끝에 몸집이 작은 딸아이를 순산했지만, 먹을 것이 없어 두 달째 죽만 먹고 있다고 했다. 박씨의 남편이 직장 동료들에게 옥수수를 꾸어다 두어 차례 옥수수밥을 해준 게, 그가 유일하게 먹은 밥다운 밥이었다. 남편도 굶고 있는 처지에 자기만 밥알을 넘기자니 목에 콱 걸려 제대로 삼키기도 힘들었다고 눈시울을 다시 붉혔다. 박씨는 남편의 만류에도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해산한 지 일주일 만에 길거리로 나섰다.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소리야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젖이 안 나와 배고파 칭얼거리는 갓난아이와 단둘이 집에 누워만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울다가 지쳐 잠든 딸아이를 등에 업고, 파지와 파철, 파비닐(폐비닐) 등을 주워 그날그날 생계를 이어간다. 박씨는 “죽이라도 아무 근심 없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한 끼 먹으면 다음 끼 걱정을 해야 한다. 이런 세월에 아이를 낳았으니, 딸아이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다”며 절망스러워했다.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에 사는 최복순(가명)씨는 산후 4개월이 되도록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에게 죽을 먹이고 있다고 했다. 장사가 좀 잘 되는 날은 입쌀가루라도 구해서 쌀죽을 쑤어 먹이지만, 허탕 치고 돌아온 날은 옥수수죽을 먹이고 있다. 최씨는 “1년도 안 된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도 못하고 죽을 먹이니 아이가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것 같고 자꾸 말라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입쌀가루라도 떨구지 말고 먹여야겠는데, 장사가 안 되니 쌀가루를 구할 데가 없다. 저 어린 것 입에 들어갈 것조차 못 구하는 지금 세월이 원망스럽다. 아이 낳은 것이 후회될 때가 많다”고 괴로워했다. 황주군에서도 요즘 젊은 부부들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세대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황주읍에서 만난 여성들은 “어른들도 먹고 살기 힘든 형편에 아이를 낳으면 최소 1년은 꼼짝 못하고 애를 키워야 하는데, 누가 벌어 먹이겠는가. 아이를 안 낳으려는 사람들 심정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해산한 뒤에도 일을 시키는 당의 처사가 너무 무자비하다고 불만을 당에 돌리는 여성들도 많다. 금순희(가명)씨는 “해산하고 나서 두 달도 안 됐는데, 녀맹에서 왜 총화 하러 나오지 않느냐고 닦달을 하더라. 조직생활에 다 참가하고 과제도 하노라면 산후 조리는 꿈도 못 꾼다. 마을 청소하러 나오라, 길 닦으러 나오라, 파철 걷어오라, 뭐하라 말이 많아서 아주 바빠 죽겠다. 이렇게 시끄럽게 구니 누가 아이를 낳고 싶겠는가?”라고 물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조직 생활에서 배려해주는 것이 없고 모두 참가해야 하니 하는 소리들이다. 당과 녀맹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옥수수도 먹지 못해 헤매는 이 세월에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것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산모에게 배급이라도 주면서 그런 말을 하든지. 아니면 사회동원을 시키지나 말든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금씨는 “콩기름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기름을 짜고 난 콩이라도 구해서 한두달 지탱하는 산모들이 많다.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얼마 없어 이렇게 가다가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자연히 없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싶다”고 우려했다. 한편 전국적으로 신생아들의 사망률도 높아지는데, 의사들은 영양부족 때문이라는 소견을 내리고 있다.

■ 여성/어린이/교육

생계난에 위험 무릅쓰고 낙태 수술

유산을 시도하는 여성들이 암암리에 늘고 있다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리원시 산과 담당 의사는 산모가 매우 위독한 상황이거나, 태아에 치명적인 장애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 한 유산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유독 작년부터 더 늘고 있다고 했다. 공식 통계가 있다기보다, 자신(의사)들을 몰래 찾아와 수술을 부탁하는 여성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화폐개혁 이후 생활이 급격히 어려워진 집들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유산을 시도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시장에서 아이를 없애준다고 소문난 약을 구해 과다복용하거나 안면이 있는 의사에게 얼마간 돈을 주고 몰래 시술을 받는다. 병원에서 시술하다가 발각되면 해당 의사는 물론이고 책임일군들까지 교화소로 직행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행해진다. 구천3동에 사는 리은주(가명)씨는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유산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마당에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하나. 어른들도 목숨을 유지하기 힘든 세월이다. 부모가 돈이 있어야 아이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바에는 애초에 낳지 않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잘하는 일”이라며, 아는 사람을 통해 몰래 의사를 찾아갔으나 시술을 거절당했다. 리씨를 만난 여자 의사는 “태아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임신 2-3개월 안에 유산해도 후유증이 큰데, 임신 6개월 넘어서 낙태수술을 하는 것은 여자들에게 해산하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준다. 이미 손발이 다 자라고 사람 형상을 갖추고 태동까지 하는 임신 6개월에 유산하는 것은 절대 쉽게 권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나 이 아주마이(리은주씨)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독한 약을 써도 그렇고, 수술해도 그렇고 뭘 하든 산모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꼭 유산을 할 것”이라며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 사회

가족 단위 꽃제비도 늘어

꽃제비들 중에는 가족 단위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량강도 혜산시 혜탄동 출신의 박영수(가명)씨는 가족과 함께 벌써 3개월 넘게 혜산역과 시장 주위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잠은 역 대합실에서, 낮에는 시장이나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박씨는 딸아이와, 아내는 아들아이와 같이 구걸하러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대합실에서 만나 네 가족이 모여 잔다. 어쩌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화폐개혁 때문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건네준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답변을 더 기다리는 눈치를 챘는지, 말을 좀 더 붙였다. “화폐개혁으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장사할 밑천이 없어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팔다가 계속 굶을 수가 없어 할 수없이 집까지 팔았다. 그게 결국 가족들을 모두 거지 신세로 만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 혼자라면 괜찮은데, 아이들과 안해까지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아무리 간부라도 돈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우리 같은 꽃제비가 될 것이다. 조선 사회는 간부나 돈 많은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씁쓸해 했다.

혜산시 꽃제비 구제소에 자리 없어

제 먹고 살 길이 바빠 다른 데 눈길을 안 주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집밖으로 나서면 안 마주치려고 해야 안 마주칠 수 없는 존재가 꽃제비들이다. 고난의 행군 때부터 워낙 오래 봐 온 탓인지,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꽃제비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으면, 제 가족이 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흠칫 놀라곤 한다는 사람이 간혹 있을 정도다. ‘꽃제비들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확실히 국내 사람들은 아니다. 도처에 있으나 무관심하게 방치되는 존재들, 꽃제비들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량강도 혜산시에도 식량난이 깊어만 가는지, 올해 부쩍 꽃제비들이 늘고 있다. 구제소에 꽃제비들을 더 넣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 주기적으로 꽃제비 단속에 나서는 보안원들조차 “잡아다 주면 뭐하나. 자리가 없는데. 하루가 다르게 매일 늘어나는 게 꽃제비인지라 단속하라고 하면 단속하는 시늉만 할 뿐”이라고 말할 정도다. 요전 날에는 혜산역 대합실에서 붙잡은 20대 남자 꽃제비가 “누구는 꽃제비가 되고 싶어서 됐느냐?”고 소리를 질러서 시끄럽게 구는 게 귀찮아 그냥 놔주었다는 보안원도 있다. 기껏 구제소에 보내봤자 다시 뛰쳐나올 게 뻔한데, 데리고 가는 동안에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 하고, 말썽피우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그에게 꽃제비들은 그저 귀찮은 존재였다. 단속해도 성과도 안 나고, 뇌물도 받아먹을 수 없어 전혀 쓸데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 보안원은 지난 1월과 2월, 두 달 동안 혜산시에서 죽은 꽃제비 수가 40명이 넘었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짐승이 40마리 죽었어도 가여운 마음이 일 법도한데,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꽃제비들이 그렇게 많이 죽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얼어 죽고, 못 먹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고 해 묻는 사람이 멋쩍어져서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