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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38호

■ 시선집중

평양 잘사는 30대 여성들, 육아 문제에 시름

북한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서 아기 엄마들은 대개 30대 여성들이다. 20대에는 제 친정 가솔들에게 신경 쓰느라 결혼에 관심이 없다가 30대 즈음에야 결혼하는 여성들이 많아져서다. 주된 관심사는 역시 육아문제이다. 남편의 한 달 월급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라, 여성들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없다. 예전 부모들은 아이를 낳으면 탁아소에 보내왔는데, 식량난 이후 아이가 못 얻어먹고 오히려 병을 얻어오는 경우가 많아 엄마들이 제 등에 들춰 업고라도 다니려고 한다. 장사를 다니는 여성들이 많아서 시장에 나오는 육아용품 중에 믿을만한 제품이 무엇인지도 이들의 주요 관심사다. 아무리 못 먹고 못살아도 아이는 잘 키우고 싶은 것이 젊은 엄마들의 바램이라서, 중국산이라고 무턱대고 샀다가 아이 몸에 해가 되는 것들은 피하려고 한다.

지방의 젊은 엄마들이 고된 하루를 보내며 아기를 키우고 있다면, 평양의 잘 사는 30대 엄마들은 비교적 여유 있게 육아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평양에서 잘 사는 집들은 국영상점에 진열된 인형들을 구입하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마시마로와 헬로 키티 같은 유명한 캐릭터 상품들도 있다. 올해 서른두살 한미경(가명)씨는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토끼 인형을 몹시 갖고 싶어 하는데 자기도 어릴 적에 아버지가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오실 때 선물로 주셨던 인형 생각이 나 눈 딱 감고 사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씨는 남편의 수입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고정 수입이 없어서) 인형 하나 사는 데에도 많은 갈등을 했다. 한씨의 바램은 애기 아빠가 하루빨리 제 자리를 잡고, 우리 가정 경제가 본가(친정)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아직 본가(친정)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리였다.

호텔 복무원으로 일하는 서은영(가명)씨도 네 살 박이 엄마인데 요즘 아이가 부쩍 자라는 통에 아이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시름을 털어놓았다. 서씨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부모의 뒷심이 없으면 생활하기가 곤란하고 가정 지탱이 어렵다. 부모집이 못 살면 자식들도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했다. 평양의 젊은 30대 여성들은 대개 친정 부모나 시댁 부모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남편은 아직 젊달 뿐 높은 직위에 올라가지 못해서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나, 부모들은 뒷돈을 챙길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서씨는 “젊은 남편들 중에 잘 나가는 사람들은 밖에 여자 한 둘 데리고 있어도, 본처가 뭐라고 시샘도 못하고 질투도 대놓고 못 한다. 집에서 쫓겨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뒤에서 욕할 뿐이고, 앞에서는 현모양처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 평양 30대 여성들의 현실”이라며 씁쓸해했다

“교사 체면도 자부심도 버렸다”

장수명(가명)씨는 량강도 혜산시에서 인민학교 3학년을 맡고 있는 선생님이다. 인민학교는 4년제인데 교복을 자체로 사며 학습용품도 자체로 산다. 중학교는 5년제인데 역시 자체로 모두 해결해야 한다. 겨울 난방도 마찬가지인데, 학기 중에는 학생마다 하루씩 당번을 정해 집에서 석탄이나 나무를 등교할 때 가지고 간다. 겨울 방학이 되면 한숨 돌릴까 싶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인민학교는 12월에서 2월 16일까지, 중학교는 12월에서 1월 중순까지 방학인데, 개학할 때 흙보산 퇴비(인분)를 한 사람당 세 양동이씩 가지고 와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게 있어야 변을 내놓을 텐데, 개학이 가까워오면 또 아이들과 부모들의 시름이 깊어지게 생겼다.

수령님 살아 계시던 옛날에는 교실마다 학생이 차 넘쳤고 쉬는 시간에는 온 학교 운동장에 웃고 떠들며 뛰어노는 애들로 꽉 찼었다. 미공급 시기로 넘어오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수가 대폭 줄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하기도 어렵지만, 좀처럼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젊은 부부는 둘만이라도 잘 살아야지 애를 낳아서 뭐 하러 고생하겠느냐고 생각한다. 입이 하나 더 불면 그만큼 살아가기가 더 어려워지니 그렇다. 설사 낳아도 키우기가 힘들고 곱게 키우기는 더 힘들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양이 부족하여 앙상한 구루병체질의 O자형 둥근 다리가 된다. 건강한 애를 낳아서 키우기란 오직 부모 된 사람의 마음속 바람일 뿐이다. 인종까지 퇴화돼가는 지금 세월에 그것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당에서는 자꾸만 건강한 아기를 낳아서 잘 키워 인민군대에 보내라고 하지만 내 입하나 해결하기도 어려운 판이니 할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살에 참군할 나이가 되어도 키가 1.55미터, 체중 45kg도 못 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아래 학년으로 내려 갈수록 학생 수는 적어진다.

옥수수밥이라도 먹을 돈이 없는 집 아이들은 부모님을 도와서 소토지를 다루거나 장마당에 나가 장사 일을 돕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시장이나 기차역을 돌아다니는 꽃제비가 된 애들, 오래전에 집을 나간 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없는 애들도 여럿이다. 중국으로 갔거나 압록강 물에 빠져 죽었거나 아니면 경비대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점점 가르치는 아이들은 줄어들고, 선생들도 밥벌이 하는 게 더 힘들어지고 있다. 장씨는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 몰래 손풍금을 가르쳐주면서 끼니 벌이를 해왔는데, 애들이 손풍금에 흥미를 잃으면서 과외 자리를 잃었다. 열 살 난 아들 아이와 땔감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지만 추운 겨울 먼 길 다녀오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아무리 선생 체면 버린 지 오래라고 해도, 남들 시선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해 지금도 수시로 과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손풍금 반주에 맞춰 웃고 떠들며 즐겁게 학습하던 일은 이제 너무 먼 과거가 되고 말았다.

외화 거래 금지에 평양 간부들 카드 사용

전국적으로 외화 사용을 금지한다는 포고문이 나온 뒤, 평양은 외국인들에게만 외화 사용을 허가하고 있다. 평양의 간부들은 상점이나 외화 식당, 호텔 등을 이용할 때 외화 대신 카드를 사용하고 있어 당장의 큰 불편은 없다. 은행에 최소 1,000달러 이상의 외화를 예금한 뒤 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는 식이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소비만 생각하면 당장 지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간부들도 있으나, 무역거래를 생각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평양보다 지방의 어려움이 더 큰데, 지방에서도 곧 외화 카드 방식을 도입하겠지만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터에 외화 사용이 자유롭지 못하면, 중국과의 거래에 지장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 은행이 얼마나 사람 속 터지게 하는지 잘 알지 않는가. 지방 간부들은 재정 확충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방 간부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신의주의 한 간부는 “내화가 이미 가치를 상실한 지금 외화 사용을 금지하면 중국으로부터 물자 구입이 어려워진다. 국가에서 식량이든 상품을 제대로 공급 못해주면, 돈(외화) 있는 사람도 굶어죽게 될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상품이든 식량이 많이 들어와야 물건 값이 그나마 떨어질 텐데, 생필품이 지급 되지 못하면 (외화 사용 금지는) 어려운 생활에 서리 끼는 격으로 더 고단해질 것이며 목숨을 졸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량강도 혜산의 간부는 처음에는 “해외 주재원들이 제일 많이 나가 있는 나라가 중국이고, 고난의 행군 시절 후 모든 것을 중국에 의지해 유지되다시피 지내온 세월인데, 사전 준비 없이 중국 돈 사용을 시장에서 금지한다니 이게 될 말인가. 만약 외화사용을 정말 금지한다면 화폐 개혁보다 더 큰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데 정말로 위에서 그것을 모를 정도로 아둔할까?”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다 외화사용 단속이 본격화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 주재하는 무역일군들은 이번 외화 사용 제한 정책이 화폐 개혁 때처럼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편 전국 보안당국에서는 시장이나 상점들에서 인민폐와 달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돈을 몰수하고, 그 출처를 밝히는데 집중하고 있다. 단속이 심해지자, 이제는 누가 외화 시세를 물어보는 것조차 불순분자로 지목될 지경이다. 곧바로 신고를 하거나, 혹시 사복 입은 보위부 일군이 떠보는 게 아닌 가 싶 어 잔뜩 경계하는 통에 주민들에게 외화가격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한편 외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서 “12월 14일, 장군님께서 달라와 인민폐를 시장에서 류통시키지 말라고 교시를 내리셔서, 장군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달라와 인민폐 대신 바꿈돈을 류통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신년 초, 집 팔려는 사람 많아

신년 초, 집을 내놓는 사람이 많다. 화폐 교환 조치 전에 어렵게 장사해서 모은 돈으로 개인 집을 샀던 사람들이 장사 밑천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괜찮은 땅집(단독 주택) 한 채에 최소 500만 원 정도 하는데, 좋은 집은 1,5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중국 돈으로는 2만 위안, 달러로는 3천 달러 정도에 거래되다보니 어지간한 돈주 아니고서는 구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사려는 사람은 적다. 돈 좀 있는 간부들이나 큰 돈주들은 이참에 싸게 좋은 집들을 사려고 돌아다니지만, 보통은 감히 꿈도 못 꾼다.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리명숙(가명)씨는 1997년에 150만 원 주고 산 땅집을 최근 500만원에 내놓았는데 안 팔린다. 중국 연길에 사는 친척에게 인민폐 4만 위안을 지원받고, 살던 아파트를 50만원에 팔아 50평 정도의 텃밭이 딸려있고, 화장실이 바깥에 따로 있는 땅집을 구입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다 2009년 화폐 교환 조치로 급속히 몰락했다. 작년에 중국 친척의 도움으로 라선에서 담배나 식품, 가전제품, 일용품, 잡화 등 중국 상품을 닥치는 대로 소매상인들에게 넘겨주는 장사를 해보았지만, 예전 수준으로는 회복하지 못했다. 리씨는 어떻게든 이번에 땅집을 팔아 중고 옷 장사를 시작하겠다며 재기의 꿈을 꾸고 있지만,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다.

전국 충성의 궐기 모임

전국 각 직장, 단위 사업장 및 인민반에서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것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꿔 주체혁명으로 매진하자”고 구호를 외치며 충성의 궐기 모임을 가졌다. 국경연선지역에서는 1월 10일까지를 특별 경비 기간으로 정했다. 산봉우리마다 있는 초소망에서 땔감을 찾으러 산에 오르는 주민들을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주요 길목에서는 일일이 몸수색을 벌인다. 인근 주민이 아니면 수색을 더 철저히 한다. 국경경비대원들은 특별경비가 10일까지라고 하지만, 음력설이 지나야 좀 풀리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국경 세관이 모두 문을 닫는 바람에 중국에서 들어가야 할 물량(식량)이 대거 발에 묶였다. 중국 정부는 애도 기간을 감안해 작년까지의 세관 허가증을 1월 한 달 더 연장하도록 조치했다.

회령, 열흘 식량 배급에 “생명을 안은 느낌”

지난 1월 8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생일을 기념해 3일 휴가를 준다고 했다가 취소됐다. “장군님께서 서거하셨는데 아들이 무슨 생일을 성대히 축하하겠느냐?”면서 하루도 휴식하지 않았다. 대신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5일(목)부터 10일 분량의 배급을 나눠주었다. 쌀과 옥수수의 비율이 1대 9였다. 5대 5 배급까지는 아니라도 3대 7 정도는 주었던 예년에 비해 무척 박해졌지만, 주민들은 감지덕지하며 받아갔다. 철이 엄마는 쌀과 옥수수가 1대 9든 2대 8이든 쌀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안은 느낌이라며 그저 고마워했다. 작년 11월 13일, 쌀 2kg씩 공급 받은 이후에 처음 받는 공급이다. 철이 엄마는 그때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그날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날 아침, 농장원들은 일찍 관리사무실을 향했다. 중국인지 어느 나라에서 식량을 지원해주었는데, 거기서 얼마간 나눠준다고 했다. 가을걷이나 탈곡 전후에 나오라고 할 때는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얼마 나오지 않더니,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사람들로 마당이 차고 넘쳤다. 농장 주재 보안원 동지와 보위부원 동지, 리당 비서와 관리 위원장 동지도 모두 나와서 긴 나무 걸상에 정색하고 앉아 있었다. 부기장 동지가 이름을 부르는 순서대로 앞에 나가서 배급 활동을 확인하여 기록하고, 인민반과 작업반, 농장 관리위원회 순으로 도장을 찍은 후 세대주 이름을 서명하고 세대 당 2kg씩 쌀을 받았다. 배정 받은 쌀의 절반은 군량미로 인민군대 장병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쌀에서 얼마는 탄광에, 얼마는 발전소 건설 현장에, 또 얼마는 어디로 보내고 난 뒤에야 주는 것이라고 하더니 세대 당 떨어진 식량이 쌀 2kg이었다. 분배를 받고 있는 중에도 간부처럼 보이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 걸상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동지들과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쌀 10가마를 급히 트럭에 싣고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 옆집 명학이네가 저건 또 어느 돌격대에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 마디 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명학이네도 꼭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새하얀 쌀 주머니에는 아무런 표식도 글씨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 보내주는 고마운 쌀일까?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는 처지에 쌀 2kg가 얼마나 고마운지, 보내준 사람들은 모르겠지. 저 아까운 쌀을 옥수수와 바꿔 먹으면 우리 네 식구가 한두 끼 정도는 죽 대신 옥수수밥을 먹을 수 있겠다. 그때가 쌀 1kg에 2,500원, 옥수수가 750원 하던 때여서 쌀을 내다팔면 옥수수 6-7kg은 받을 수 있었다. 절반은 옥수수로 바꾸고, 나머지는 한 주머니에 2,200원씩 하는 땔감을 살까. 철이 엄마는 순번을 기다리면서 벌써 이렇게 먹어봤다가 저렇게 팔아봤다가 머릿속이 분주했다.

마침내 쌀을 받아들고 돌아와서는 한 끼라도 쌀을 먹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죽이라도 한 끼 배불리 먹어보자며 타온 쌀을 한 줌 덜어 물을 멀거니 붓고 죽을 끓였다. 중국산 맛내기를 한 숟가락 떠서 간을 맞추었다. 같은 죽이라도 옥수수죽과 쌀죽은 천지 차이였다. 한 숟가락 떴는데도 혀에 착 감기는 맛 하며 어찌나 찰 지게 느껴지는지,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식구들도 잔칫날 같다며 쌀죽 한 그릇에 너무도 기뻐했다. 철이 엄마는 먹는 중에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쌀은 인체에 필요한 많은 미량 원소들이 있어 쉽게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는다”고 신나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보냈는데 내일은 뭘 먹고 어떻게 보낼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일은 내일 다시 볼 판이다. 죽기 아니면 살겠지’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지금껏 옥수수풀죽으로 버텨온 것이다. 쌀과 옥수수가 1대 9 비율이든 뭐든 서운할 새도 없이, 국정가격으로 열흘 배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꿈만 같다.

입쌀죽 한 그릇의 힘

병든 어머니는 이른 아침 땔감나무를 하러 나가는 11살 아들을 먹이려고 옥수수쌀로 풀죽을 끓인다. 한 줌도 안 되는 양을 불린 탓에 두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지 않은 틈을 타 제 죽사발 안에 밥그릇을 엎어놓고 죽으로 덮는다. 아들의 죽사발에는 어미의 몫이 더 담긴다. 북한 출신인 김규민 감독이 10년 전 황해북도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한 「겨울나비」(2011년)의 한 장면이다. 어머니는 나무를 하다 쓰러진 어린 아들에게 미음조차 먹일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자, 최고지도자의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에게 밥 한 끼만 먹이게 해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끝내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다. 새해 초, 열흘 분량의 배급을 받고 ‘생명을 안은 느낌’이라며 감격스러워하는 회령 여성의 고백에 이 영화가 떠올랐다. 우리가 죽어갈 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북한 주민들은 죽 한 그릇에 죽고 사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힘겨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인도주의 식량 지원을 조속히 단행해주기를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에 진심으로 호소한다.

■ 사회

평양 잘사는 30대 여성들, 육아 문제에 시름

북한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서 아기 엄마들은 대개 30대 여성들이다. 20대에는 제 친정 가솔들에게 신경 쓰느라 결혼에 관심이 없다가 30대 즈음에야 결혼하는 여성들이 많아져서다. 주된 관심사는 역시 육아문제이다. 남편의 한 달 월급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라, 여성들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없다. 예전 부모들은 아이를 낳으면 탁아소에 보내왔는데, 식량난 이후 아이가 못 얻어먹고 오히려 병을 얻어오는 경우가 많아 엄마들이 제 등에 들춰 업고라도 다니려고 한다. 장사를 다니는 여성들이 많아서 시장에 나오는 육아용품 중에 믿을만한 제품이 무엇인지도 이들의 주요 관심사다. 아무리 못 먹고 못살아도 아이는 잘 키우고 싶은 것이 젊은 엄마들의 바램이라서, 중국산이라고 무턱대고 샀다가 아이 몸에 해가 되는 것들은 피하려고 한다.

지방의 젊은 엄마들이 고된 하루를 보내며 아기를 키우고 있다면, 평양의 잘 사는 30대 엄마들은 비교적 여유 있게 육아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평양에서 잘 사는 집들은 국영상점에 진열된 인형들을 구입하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마시마로와 헬로 키티 같은 유명한 캐릭터 상품들도 있다. 올해 서른두살 한미경(가명)씨는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토끼 인형을 몹시 갖고 싶어 하는데 자기도 어릴 적에 아버지가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오실 때 선물로 주셨던 인형 생각이 나 눈 딱 감고 사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씨는 남편의 수입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고정 수입이 없어서) 인형 하나 사는 데에도 많은 갈등을 했다. 한씨의 바램은 애기 아빠가 하루빨리 제 자리를 잡고, 우리 가정 경제가 본가(친정)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아직 본가(친정)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리였다.

호텔 복무원으로 일하는 서은영(가명)씨도 네 살 박이 엄마인데 요즘 아이가 부쩍 자라는 통에 아이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시름을 털어놓았다. 서씨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부모의 뒷심이 없으면 생활하기가 곤란하고 가정 지탱이 어렵다. 부모집이 못 살면 자식들도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했다. 평양의 젊은 30대 여성들은 대개 친정 부모나 시댁 부모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남편은 아직 젊달 뿐 높은 직위에 올라가지 못해서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나, 부모들은 뒷돈을 챙길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서씨는 “젊은 남편들 중에 잘 나가는 사람들은 밖에 여자 한 둘 데리고 있어도, 본처가 뭐라고 시샘도 못하고 질투도 대놓고 못 한다. 집에서 쫓겨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뒤에서 욕할 뿐이고, 앞에서는 현모양처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이 우리 평양 30대 여성들의 현실”이라며 씁쓸해했다

“교사 체면도 자부심도 버렸다”

장수명(가명)씨는 량강도 혜산시에서 인민학교 3학년을 맡고 있는 선생님이다. 인민학교는 4년제인데 교복을 자체로 사며 학습용품도 자체로 산다. 중학교는 5년제인데 역시 자체로 모두 해결해야 한다. 겨울 난방도 마찬가지인데, 학기 중에는 학생마다 하루씩 당번을 정해 집에서 석탄이나 나무를 등교할 때 가지고 간다. 겨울 방학이 되면 한숨 돌릴까 싶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인민학교는 12월에서 2월 16일까지, 중학교는 12월에서 1월 중순까지 방학인데, 개학할 때 흙보산 퇴비(인분)를 한 사람당 세 양동이씩 가지고 와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게 있어야 변을 내놓을 텐데, 개학이 가까워오면 또 아이들과 부모들의 시름이 깊어지게 생겼다.

수령님 살아 계시던 옛날에는 교실마다 학생이 차 넘쳤고 쉬는 시간에는 온 학교 운동장에 웃고 떠들며 뛰어노는 애들로 꽉 찼었다. 미공급 시기로 넘어오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수가 대폭 줄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하기도 어렵지만, 좀처럼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젊은 부부는 둘만이라도 잘 살아야지 애를 낳아서 뭐 하러 고생하겠느냐고 생각한다. 입이 하나 더 불면 그만큼 살아가기가 더 어려워지니 그렇다. 설사 낳아도 키우기가 힘들고 곱게 키우기는 더 힘들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양이 부족하여 앙상한 구루병체질의 O자형 둥근 다리가 된다. 건강한 애를 낳아서 키우기란 오직 부모 된 사람의 마음속 바람일 뿐이다. 인종까지 퇴화돼가는 지금 세월에 그것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당에서는 자꾸만 건강한 아기를 낳아서 잘 키워 인민군대에 보내라고 하지만 내 입하나 해결하기도 어려운 판이니 할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살에 참군할 나이가 되어도 키가 1.55미터, 체중 45kg도 못 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아래 학년으로 내려 갈수록 학생 수는 적어진다.

옥수수밥이라도 먹을 돈이 없는 집 아이들은 부모님을 도와서 소토지를 다루거나 장마당에 나가 장사 일을 돕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시장이나 기차역을 돌아다니는 꽃제비가 된 애들, 오래전에 집을 나간 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없는 애들도 여럿이다. 중국으로 갔거나 압록강 물에 빠져 죽었거나 아니면 경비대 총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점점 가르치는 아이들은 줄어들고, 선생들도 밥벌이 하는 게 더 힘들어지고 있다. 장씨는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 몰래 손풍금을 가르쳐주면서 끼니 벌이를 해왔는데, 애들이 손풍금에 흥미를 잃으면서 과외 자리를 잃었다. 열 살 난 아들 아이와 땔감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지만 추운 겨울 먼 길 다녀오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아무리 선생 체면 버린 지 오래라고 해도, 남들 시선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해 지금도 수시로 과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손풍금 반주에 맞춰 웃고 떠들며 즐겁게 학습하던 일은 이제 너무 먼 과거가 되고 말았다.

■ 정치생활

외화 거래 금지에 평양 간부들 카드 사용

전국적으로 외화 사용을 금지한다는 포고문이 나온 뒤, 평양은 외국인들에게만 외화 사용을 허가하고 있다. 평양의 간부들은 상점이나 외화 식당, 호텔 등을 이용할 때 외화 대신 카드를 사용하고 있어 당장의 큰 불편은 없다. 은행에 최소 1,000달러 이상의 외화를 예금한 뒤 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는 식이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소비만 생각하면 당장 지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간부들도 있으나, 무역거래를 생각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평양보다 지방의 어려움이 더 큰데, 지방에서도 곧 외화 카드 방식을 도입하겠지만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터에 외화 사용이 자유롭지 못하면, 중국과의 거래에 지장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 은행이 얼마나 사람 속 터지게 하는지 잘 알지 않는가. 지방 간부들은 재정 확충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방 간부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신의주의 한 간부는 “내화가 이미 가치를 상실한 지금 외화 사용을 금지하면 중국으로부터 물자 구입이 어려워진다. 국가에서 식량이든 상품을 제대로 공급 못해주면, 돈(외화) 있는 사람도 굶어죽게 될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상품이든 식량이 많이 들어와야 물건 값이 그나마 떨어질 텐데, 생필품이 지급 되지 못하면 (외화 사용 금지는) 어려운 생활에 서리 끼는 격으로 더 고단해질 것이며 목숨을 졸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량강도 혜산의 간부는 처음에는 “해외 주재원들이 제일 많이 나가 있는 나라가 중국이고, 고난의 행군 시절 후 모든 것을 중국에 의지해 유지되다시피 지내온 세월인데, 사전 준비 없이 중국 돈 사용을 시장에서 금지한다니 이게 될 말인가. 만약 외화사용을 정말 금지한다면 화폐 개혁보다 더 큰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데 정말로 위에서 그것을 모를 정도로 아둔할까?”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다 외화사용 단속이 본격화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 주재하는 무역일군들은 이번 외화 사용 제한 정책이 화폐 개혁 때처럼 얼마 못 가 흐지부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편 전국 보안당국에서는 시장이나 상점들에서 인민폐와 달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돈을 몰수하고, 그 출처를 밝히는데 집중하고 있다. 단속이 심해지자, 이제는 누가 외화 시세를 물어보는 것조차 불순분자로 지목될 지경이다. 곧바로 신고를 하거나, 혹시 사복 입은 보위부 일군이 떠보는 게 아닌 가 싶 어 잔뜩 경계하는 통에 주민들에게 외화가격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한편 외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서 “12월 14일, 장군님께서 달라와 인민폐를 시장에서 류통시키지 말라고 교시를 내리셔서, 장군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달라와 인민폐 대신 바꿈돈을 류통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전국 충성의 궐기 모임

전국 각 직장, 단위 사업장 및 인민반에서는 김정은 부위원장이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것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꿔 주체혁명으로 매진하자”고 구호를 외치며 충성의 궐기 모임을 가졌다. 국경연선지역에서는 1월 10일까지를 특별 경비 기간으로 정했다. 산봉우리마다 있는 초소망에서 땔감을 찾으러 산에 오르는 주민들을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주요 길목에서는 일일이 몸수색을 벌인다. 인근 주민이 아니면 수색을 더 철저히 한다. 국경경비대원들은 특별경비가 10일까지라고 하지만, 음력설이 지나야 좀 풀리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국경 세관이 모두 문을 닫는 바람에 중국에서 들어가야 할 물량(식량)이 대거 발에 묶였다. 중국 정부는 애도 기간을 감안해 작년까지의 세관 허가증을 1월 한 달 더 연장하도록 조치했다.

■ 경제활동

신년 초, 집 팔려는 사람 많아

신년 초, 집을 내놓는 사람이 많다. 화폐 교환 조치 전에 어렵게 장사해서 모은 돈으로 개인 집을 샀던 사람들이 장사 밑천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괜찮은 땅집(단독 주택) 한 채에 최소 500만 원 정도 하는데, 좋은 집은 1,5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중국 돈으로는 2만 위안, 달러로는 3천 달러 정도에 거래되다보니 어지간한 돈주 아니고서는 구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사려는 사람은 적다. 돈 좀 있는 간부들이나 큰 돈주들은 이참에 싸게 좋은 집들을 사려고 돌아다니지만, 보통은 감히 꿈도 못 꾼다.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리명숙(가명)씨는 1997년에 150만 원 주고 산 땅집을 최근 500만원에 내놓았는데 안 팔린다. 중국 연길에 사는 친척에게 인민폐 4만 위안을 지원받고, 살던 아파트를 50만원에 팔아 50평 정도의 텃밭이 딸려있고, 화장실이 바깥에 따로 있는 땅집을 구입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다 2009년 화폐 교환 조치로 급속히 몰락했다. 작년에 중국 친척의 도움으로 라선에서 담배나 식품, 가전제품, 일용품, 잡화 등 중국 상품을 닥치는 대로 소매상인들에게 넘겨주는 장사를 해보았지만, 예전 수준으로는 회복하지 못했다. 리씨는 어떻게든 이번에 땅집을 팔아 중고 옷 장사를 시작하겠다며 재기의 꿈을 꾸고 있지만,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다.

■ 식량소식

회령, 열흘 식량 배급에 “생명을 안은 느낌”

지난 1월 8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생일을 기념해 3일 휴가를 준다고 했다가 취소됐다. “장군님께서 서거하셨는데 아들이 무슨 생일을 성대히 축하하겠느냐?”면서 하루도 휴식하지 않았다. 대신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5일(목)부터 10일 분량의 배급을 나눠주었다. 쌀과 옥수수의 비율이 1대 9였다. 5대 5 배급까지는 아니라도 3대 7 정도는 주었던 예년에 비해 무척 박해졌지만, 주민들은 감지덕지하며 받아갔다. 철이 엄마는 쌀과 옥수수가 1대 9든 2대 8이든 쌀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안은 느낌이라며 그저 고마워했다. 작년 11월 13일, 쌀 2kg씩 공급 받은 이후에 처음 받는 공급이다. 철이 엄마는 그때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그날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날 아침, 농장원들은 일찍 관리사무실을 향했다. 중국인지 어느 나라에서 식량을 지원해주었는데, 거기서 얼마간 나눠준다고 했다. 가을걷이나 탈곡 전후에 나오라고 할 때는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얼마 나오지 않더니,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사람들로 마당이 차고 넘쳤다. 농장 주재 보안원 동지와 보위부원 동지, 리당 비서와 관리 위원장 동지도 모두 나와서 긴 나무 걸상에 정색하고 앉아 있었다. 부기장 동지가 이름을 부르는 순서대로 앞에 나가서 배급 활동을 확인하여 기록하고, 인민반과 작업반, 농장 관리위원회 순으로 도장을 찍은 후 세대주 이름을 서명하고 세대 당 2kg씩 쌀을 받았다. 배정 받은 쌀의 절반은 군량미로 인민군대 장병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쌀에서 얼마는 탄광에, 얼마는 발전소 건설 현장에, 또 얼마는 어디로 보내고 난 뒤에야 주는 것이라고 하더니 세대 당 떨어진 식량이 쌀 2kg이었다. 분배를 받고 있는 중에도 간부처럼 보이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 걸상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동지들과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쌀 10가마를 급히 트럭에 싣고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 옆집 명학이네가 저건 또 어느 돌격대에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 마디 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명학이네도 꼭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새하얀 쌀 주머니에는 아무런 표식도 글씨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 보내주는 고마운 쌀일까?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는 처지에 쌀 2kg가 얼마나 고마운지, 보내준 사람들은 모르겠지. 저 아까운 쌀을 옥수수와 바꿔 먹으면 우리 네 식구가 한두 끼 정도는 죽 대신 옥수수밥을 먹을 수 있겠다. 그때가 쌀 1kg에 2,500원, 옥수수가 750원 하던 때여서 쌀을 내다팔면 옥수수 6-7kg은 받을 수 있었다. 절반은 옥수수로 바꾸고, 나머지는 한 주머니에 2,200원씩 하는 땔감을 살까. 철이 엄마는 순번을 기다리면서 벌써 이렇게 먹어봤다가 저렇게 팔아봤다가 머릿속이 분주했다.

마침내 쌀을 받아들고 돌아와서는 한 끼라도 쌀을 먹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죽이라도 한 끼 배불리 먹어보자며 타온 쌀을 한 줌 덜어 물을 멀거니 붓고 죽을 끓였다. 중국산 맛내기를 한 숟가락 떠서 간을 맞추었다. 같은 죽이라도 옥수수죽과 쌀죽은 천지 차이였다. 한 숟가락 떴는데도 혀에 착 감기는 맛 하며 어찌나 찰 지게 느껴지는지,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식구들도 잔칫날 같다며 쌀죽 한 그릇에 너무도 기뻐했다. 철이 엄마는 먹는 중에도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쌀은 인체에 필요한 많은 미량 원소들이 있어 쉽게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는다”고 신나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보냈는데 내일은 뭘 먹고 어떻게 보낼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일 일은 내일 다시 볼 판이다. 죽기 아니면 살겠지’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지금껏 옥수수풀죽으로 버텨온 것이다. 쌀과 옥수수가 1대 9 비율이든 뭐든 서운할 새도 없이, 국정가격으로 열흘 배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