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늘의 북한소식 443호

■ 시선집중

아침밥만 세 번 차리는 이유

지은씨는 매일 아침밥을 세 번씩 차린다. 식구라야 시부모님과 지은씨 부부, 그리고 두 딸 해서 6명이 사는데 아침상을 왜 세 번이나 차리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지은씨는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조곤조곤 사연을 얘기했다.

“저는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불이 없으니 어둠을 더듬어 부엌에 내려앉아요. 그러면 삭정이와 검불을 집어넣고 성냥으로 불을 피죠. 빨간 불길이 아궁이에 일면 그나마 집안이 희미하게 밝아져요. 온기도 도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전 그 시간이 제일 좋아요. 옥수수 500g 정도가 그날 아침과 점심 식량이에요. 여섯 식구가 먹자면 1kg는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막 먹어치우면 열흘 분 식량을 5일이나 먹고 거덜이 나겠으니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낮이 짧고 밤이 기니 적게 먹고 움직이지 말고 날이 어두우면 일찍 자리에 누워서 자야 해요.

예전에는 다 같이 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요즘엔 시부모님이 아들과 같이 식사를 안 하세요. 같이 밥을 먹으니까, 우리 세대주가 자꾸 자기 밥그릇에 있는 밥을 덜어서 시부모님께 드리고, 염장 무라도 더 많이 드시라고 양보하거든요. 먹을 것 없는 상차림에 날이면 날마다 아들이 그렇게 주니, 시부모님들은 아들이 한 수저라도 더 먹어야 힘을 내서 일을 할 게 아니냐며 아예 아들과 같이 식사를 안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먼저 먹고 일을 나가면, 그 다음에 나머지 식구들이 식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어요. 시부모님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많이 먹고 아프지 말아야 집안을 이끌고 버텨 나갈 수 있다고 믿으시니까요.

일 나가는 남편을 위해 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밥 한 그릇에 새하얀 배추김치 한 접시, 무 오가리 장 무침 한 접시, 감자 국 한 사발을 내놓아요. 요즘 고춧가루가 너무 비싸서 김치를 하얗게 그냥 절였어도 이만하면 괜찮은 아침 식사죠. 점심과 저녁은 대충 먹어도 아침은 잘 먹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래서 아침밥만은 꼭 따스한 새 밥을 지어드리고 감자 국이든 무국이든 국을 꼭 끓여내요. 정 없으면 따스한 맹물이라도 꼭 한 그릇 떠서 밥사발과 나란히 올리죠. 국에다 밥을 말아 먹으면 배도 채우고 수분도 보충할 수 있어서요. 이 추운 겨울에 일하다가 갈증 나면 어디서 따스한 맹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나 싶으니, 갈증 나지 마시라고 국이라도 챙겨드리는 거죠.

남편이 한 술 뜨고 일어나면, 7살짜리 딸애와 5살짜리 작은 딸애가 그 다음에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세수도 안 하고 말똥하니 앉아 아버지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요. 아직 철이 없어서, 아버지가 그만큼만 드시고 이제 나머지 밥을 자기들 밥그릇에 덜어주기를 기다리는 거죠. 남편은 그런 아이들의 눈치를 빤히 잘 알기 때문에 밥을 꼭 한 두 숟가락씩 남겨요. 아버지가 일어나면 바로 두 딸아이가 밥상에 달려들어 숟가락부터 움켜들어요. 전 그때 애들 밥을 떠서 두 번째 상을 차려요. 큰애는 좀 머리가 굵었다고, 자기 밥그릇 밥부터 먹지만, 작은 애는 아버지가 남긴 밥그릇부터 제 앞으로 끌어당겨놓고 먹곤 해요.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입 하나가 무서워서 금세 김치도 떨어지고, 국도 동이 나요. 반찬이 바닥이 나도 더 채워주지 못해요. 좀 남은 반찬도 상 밑에 끌어내려놓고 애들이 더 못 먹게 하죠. 시부모님도 드셔야 하니까요. 아이들은 감자국 그릇에 밥공기를 거꾸로 쏟아 넣은 밥을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금세 먹어치워요. 한 번도 더 준 일이 없어서 아이들도 더 달라는 소리를 안 해요.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요. 바깥 날씨가 지독하게 추워서 아이들을 내보낼 수가 없어요. 가마 목에 누워 있으면 춥지도 않고, 배도 덜 고프니까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누워 있을 때가 많죠.

시부모님은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상을 받으세요. 요즘 기침이 심해져서 밤새 고생하다가 새벽녘에나 주무시니까 그만큼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졌어요. 옥수수밥과 무오가리 장무침, 감자국을 두분 다 똑같은 양으로 내드리는데 그릇은 남편 그릇에 비하면 더 작아요. 김치 같은 건 남편과 아이들이 다 먹을 때면 못 드릴 때도 많아요. 남편과 아이들 밥을 챙겨준 뒤에 저도 시부모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저는 밥그릇을 절대 상위에 올려놓고 먹지 않아요. 다른 밥보다 아무래도 거칠고 양도 적으니까, 괜히 시부모님이 눈치 보고 저 때문에 못 드실까 싶어서요. 시부모님도 제가 이렇게 먹는 이유를 모를 리야 없겠지만, 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해요. 시부모님도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처럼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가 쉽니다.

이렇게 우리 집은 매일 아침상을 세 번 차립니다. 설거지를 끝내면, 저는 고이 남겨 놓은 밥 한 그릇을 가마 목에 잘 덮어둬요. 남편이 일하고 돌아와 점심식사를 할 수 있게요. 나머지 식구들은 점심을 못 먹은 지가 벌써 4년이 넘었어요. 아침 먹고, 저녁 먹으면 그만이죠. 우리 집만 그러나요?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하루에 두 끼 먹는 집이 태반인데요.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이제는 점심 때가 되어도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점심을 먹는 사람들은 간부나 화교들, 아니면 돈 잘 버는 장사치들이겠죠. 식사 준비와 설거지, 그리고 점심식사까지 챙겨놓고 나면, 저는 삭정이라도 주우려고 마을 뒷산에 나갑니다. 한 식구가 한상에 모여앉아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을 먹을 날이 언제나 올지 모르겠습니다

빚 독촉에 목숨 걸고 도강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정옥씨는 지난 해 12월 10일경 도강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 중국에 사는 남편의 작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국경연선지역에서 더 이상 총소리를 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렸지만, 당시만 해도 너무 살벌해서 감히 넘어갈 꿈을 못 꿀 때였다.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도 지금은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할 때라고 말렸다. 하지만 정옥씨는 빚 독촉을 당하고 있어 절박했다. 돈주들은 껄렁껄렁한 사내들을 보내 허리를 다쳐 누워있는 남편에게 빚을 갚지 않는다고 발길질해 냈다. 미친 여자처럼 사내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울고 불었다. 사내들은 한 달 말미를 주겠지만, 더 이상 봐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더 팔 세간도 없고, 돈을 꾸어 돌려막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더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 날마다 홀로 눈물을 삼키던 정옥씨는 콱 죽어버릴까 생각을 하다가 10년 전 도움을 받았던 중국 친척을 떠올렸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도강을 한 번 해보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청진 수남시장 북쪽 골목에서 허술한 버스를 탔다. 최근에 버스비가 만원으로 올랐는데, 내가 떠날 때만 해도 5천원이었다. 버스 유리창은 다 깨져 성한 것이 없었다. 깨진 창 틈새로 칼바람이 들어오곤 했지만, 비좁은 차안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탓에 그리 춥지 않았다. 버스는 수성, 석막, 장흥을 지나쳐 회령으로 가는 동안 초소를 다섯 번 지났는데,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고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어도 어쩌다 초소병들 눈과 마주치면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공민증을 보이면 그대로 보내주는 분위기였다. 버스는 아주 힘겹게 무산령을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면서는 다소 속도가 빨라졌다. 아침 9시에 떠났는데, 회령에 들어선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150리길을 5시간 넘게 걸린 것이다. 버스 속력도 속력이지만, 초소에서 공민증을 검사하느라 지체한 시간도 길었다. 회령에서 500원을 주고, 유선으로 가는 서비차를 탔다. 10년 전에 도강할 때 도움을 받았던 이의 집을 찾아가는데 기억을 더듬으며 가느라 또 시간이 걸렸다. 연선지역 사람들은 워낙 추방을 많이 당한 터라 그 사람이 아직 거기 살아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길에 하늘이 도왔는지 그때 그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머니도 금세 나를 알아보고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했다. 마침 저녁때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어서, 가방에서 주먹밥 두 덩이를 꺼내 아주머니와 하나씩 나눠 뜨거운 물에 말아 먹었다. 둘이 나란히 가마 목에 누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도 나를 보자마자 바로 눈치 챘기 때문에 얘기는 쉽게 풀렸다.

아주머니는 10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그때는 어지간하면 경비대가 길을 열어주었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더 본다고 했다. 뭘 하러 가는 사람인지, 혹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지, 무슨 물건을 가지고 가며, 누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지 등등 세세하게 따지기 때문에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도강자는 무조건 반역자로 취급하는 분위기라 어지간해서는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돈 몇 푼 바라고 잘못 도왔다가 철창신세를 질 수 있어서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흔들기에 딱한 집안 사정을 얘기했다. 10년 전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중국 친척집을 찾았을 때 작은아버지 내외 모두 건강하고 유족한 편이어서 인민폐 2만 위안을 도움 받았다. 그 돈으로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 우리 부부해서 여섯 식구가 한 3년 시름없이 잘 살 수 있었다. 시동생을 결혼시켜 분가시키고 시누이를 시집보내고 나니, 또 아이 둘이 태어나서 식구는 다시 6명이 되었다. 그 뒤로 시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남편도 농장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친 것이 고질이 되어 힘든 일은 하지 못하게 되면서 살림살이는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받은 돈은 다 써버리고, 가정기물과 옷가지들을 중고 시장에 팔아서 식량을 사먹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없어져서 꿔먹기 시작했다. 빌린 돈을 갚아줄 구멍수는 없고, 그러다나니 그렇게 좋던 집을 팔아 단칸짜리 땅집에 들면서 빚을 갚아야 했다.

텃밭 500평방 딸린 독집으로, 울타리를 높고 든든하게 둘러막고 남새를 심으면 한 열세대가 족히 먹을 수 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집이었다. 지금 팔면 400만원은 받을 수 있을 텐데, 급하게 내놓느라고 제값을 못 받은 게 지금도 속이 쓰리다. 새로 이사한 집은 20평방이나 되는 면적에 텃밭이라야 30평방도 되지 않는 문화주택이다. 그것도 5세대가 한 룡마루에 붙어 있는 개인집이다. 빚은 늘어만 갔다. 봄에 옥수수를 100kg 꾸고, 가을에 200kg를 주기로 하였는데 3년 내내 제대로 갚은 적이 없다. 심한 빚 독촉에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농장의료보건소에서 의사로 일하는 먼 친척 되는 선생한테서 진단서를 떼서 직장에 얼마간 말미를 받아 이 길을 오게 됐다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었다.

이번에 또 한 번 도와주시면 절대 서운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고 힘주어 약속했다. 아주머니는 가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정 그렇게 원하면 한 번 해보자며 길을 찾아봐주었다. 일주일을 더 머물고서야 저녁 8시부터 9시 사이에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어떤 젊은 사내가 와서 강을 건네주고 받아주고 다시 아주머니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에 인민폐 2천 위안과 장백산표 담배 두 막대기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마하고는 준비해둔 주먹밥 3개와 볶은 옥수수 한 공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혼자 그 사람을 따라나섰다.

두만강 위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었을까. 사방을 분간도 못하는 어둠 속에서도 그 청년은 용케 약속장소를 알아보았는지, 어느 지점에 도착하니 나지막하게 휘파람소리를 세 번 냈다. 그때 숲속에서 어깨에 총을 멘 군인 두 명이 나오더니 손짓을 했다. 같이 왔던 청년은 어느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만 혼자 남았다. 이번에도 무작정 그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따라 가니, 10분이나 지났을까. 조금 걸으니 하얀 얼음 강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어붙은 두만강이었다. 그때부터 뒤도 안돌아보고 강 건너편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세상을 향해 숨이 헐떡이도록 뛰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흙을 밟는 순간 그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작은 아버지 내외는 여전히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다만 두 분이 10년 전보다 더 늙고 힘이 없어 지원을 그때만큼 못해주어 미안하다며, 인민폐 1만 위안을 건네주셨다. 길안내를 해준 청년에게 2천 위안과 장백산 담배 두 막대기에 아주머니의 알선 사례비 등 이러저런 서비 값을 떼고도 6천 위안이 넘게 남았다. 그 돈으로 내리 3년이나 빌린 옥수수와 꾼 돈을 갚고 나니, 우리 돈으로 80만원이 남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강을 건너니 살 길이 열렸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중국 다녀온 뒤에도 뇌물 바쳐야

림일씨는 중국에 가서 사야할 꼭 필요한 물건들 목록부터 챙겼다. 부모님께서 드실 약이 제일 많았지만, 보위부원이 꼭 구해달라고 한 것도 많았다. 종이장에 연필, 공책, 복사지, 사진, 필름 등 사무용품에 폐렴약과 간염약도 구해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폐와 간이 나쁘다고 했다. 보위부원 동지는 다 사봐야 인민폐로 500위안도 안 될 거라면서 웃었다. 림일씨는 기가 차 “인민폐 500위안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 농장에 10년 넘게 꼬박 출근해야 현금 분배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냐. 작년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출근했어도 연말 분배 때 겨우 1만 8천원 탔다. 그것도 한꺼번에 안 주고, 세 번에 나눠준다고 6천원밖에 못 받았다. 만8천원 다 받는다고 해도 요즘 시세로 하면 인민폐 40위안도 안 된다”고 보위부원 동지의 부탁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보안원 동지가 부탁한 물건도 9가지나 되었다. 림일씨는 전기가 없어 텔레비전도 못 보는데, 보안원 동지는 전기요를 사달라고 했다. 림일씨는 소문을 들으니 전기 제품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하니 “보안원 동지가 세관에 자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자기 이름만 대면 다 봐 줄 것이라고 해서 못 가져오겠다는 말을 더 못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전기 제품도 어지간하면 봐주고, 중고 옷들도 깨끗이 씻어서 잘 다듬으면 다 들어 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세관원들에게 담배 몇 막대를 쥐어줘도 통과가 어렵다. 림일씨도 중고 옷을 받아와 장사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요즘 단속이 워낙 심해서 기대를 안 하기로 했다.

까다로운 정치 심사와 담화를 마치고 주의해야 할 점들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들었다. 절대 말조심하고 아랫마을(남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고, 기한 안에(1개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외사과 동지와 반탐부 동지에게도 뭣 좀 챙겨주려면 이모에게 최소 3천 위안 이상은 지원받아야 했다. 동료들은 이번에 나가면 또 언제 다시 도강증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나간 김에 일자리도 찾아보라고 했다. 아는 사람들은 체류기간이 지나도 몇 달씩 눌러 살면서 돈을 벌어온다고 했다. 림일씨는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집에서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 생각에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이모 집에 도착하니 쉽지 않았다. 이모네는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원을 넉넉하게 해줄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모가 워낙 그 동네에서 인심이 후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이모 소개로 가축을 키우는 한족 일을 거들 수 있었다. 림일씨는 화교에게 진 빚도 갚고, 간부들에게 줄 뇌물도 챙기고, 부모님께 드릴 약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법으로라도 도강을 하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지난 3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도강증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 너무 아쉽고 억울한 감도 들지만, 이제라도 다녀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돈 꾸고 멧돼지 잡아 도강증 발급 성공

림일씨는 최근 도강증을 발급받고,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이 다 중국에 살고 있는데, 워낙 멀리 살기도 하고 떨어져 산지 오래돼 얼굴도 모르고, 조선말도 모르는 한족처럼 되고 말았지만, 유일하게 룡정 삼합에 사는 작은 이모만은 간간이 연락이 닿았다. 다행히 그 이모가 친척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 친척 방문으로 도강증 수속을 시작했는데,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최근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람들 얘기로는 돈을 쓰지 않아서 늦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돈으로 적어도 2천 위안은 있어야 도강증이 나온다고 했다. 요즘 시세로 하면 돈 100만원은 들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림일씨는 “그 돈이 있으면 뭣 하러 친척방문을 하겠느냐, 너무 먹고 살기 바쁘니까 가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해보았지만,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모르면서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신기하다고 빈정거렸다. 림일씨는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지금껏 100만원을 가져본 적도 없고 본적도 없으니 그저 가만히 앉아 도강증이 나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림일씨는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지 않느냐. 내가 내 이모를 보러 가겠다는데, 그것도 몰래 도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속을 밟아 가겠다는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단 말이냐. 요즘은 세상이 통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런 림일씨가 딱했던지, 직장 동료들은 화교에게 돈을 빌려보기라도 하라고 몇 번이나 조언해주었다. 귓등으로 흘려듣던 림일씨도 작년 농사도 잘 안되어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이모의 도움을 꼭 받아야겠기에 같은 인민반에 사는 화교에게 월 이자 300위안에 중국에 다녀오면 본전과 이자를 갚기로 하고 돈을 꾸었다. 돈 빌리는 것도 쉽지 않아서 숱한 사람이 앞에 나서서 주선해주고 담보를 서주어야 했다. 이제껏 남을 속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림일씨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담보를 서주어 겨우 80만원을 연통할 수 있었다. 리당 비서에게 10만원, 외사지도원에게 10만원, 외사과장에게 10만원, 반탐과장에게 10만원, 반탐부부장에게 20만원, 그 외에 여기저기 20만원을 더 쓰니 돈이 부족했다. 림일씨는 겨울 산기슭에서 멧돼지를 잡아 보위부원과 보안원에게 각각 20kg씩 나눠주었다. 돼지고기가 1kg에 6천원이 넘으니, 한 사람당 최소 12만원씩은 준 셈이다.

돈 100만원에 멧돼지 한 마리를 바쳐서 우여곡절 끝에 도강증을 손에 넣고 보니, 감개무량했다. 림일씨가 도강증을 얻은 소식은 반나절도 안 돼 온 동네에 퍼졌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옛날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한 것처럼 온 동네가 야단이었다. 서로 인사도 안 하던 사람들까지 이제 살 길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웃는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넬 정도였다. 림일씨는 진짜 공화국의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이모 만나러 가는 게 큰 자랑거리도 아닌데, 이렇게 바쁜 세월에는 중국 친척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태양절 맞아 추가 대사령 예고

중앙당은 오는 4월 15일 태양절을 맞아 추가 대사령을 실시할 것을 전국 도당에 지시했다. 2월 16일 명절 기념 대사령에 이은 것으로, 최근 강도 높은 주민 통제에 불만이 높던 민심을 한결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1일, 함경북도 회령시 인근에 위치한 전거리 교화소에서는 대규모의 수감자 사면이 있었다. 중국에 도강했다가 붙잡혀와 3년 이상의 형을 받은 여성수감자들이 많았다. 형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출소된 여성들은 갑작스런 사면에 영문 몰라 하면서도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수감자와 관련이 없는 주민들도 2월 16일 명절을 앞두고 김정은 동지의 배려로 대사령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함께 반가워했다. 전거리교화소 외에도 전국 노동 단련대와 교화소 등지에서는 경제범죄를 비롯한 각종 범죄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실시됐다.

‘중국만이 살 길’이라는데

중국에 가는 도강증을 얻은 이는 마치 공화국의 영웅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살 길이 생겼다며 너도나도 축하해주는 분위기다. 중국은 북한 주민들의 유일한 ‘살 길’이 되었다. 하여 우리는 북한의 민심이 중국에 기울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최근 남한 정부가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비롯해 고구려 고분군 일대 산림 병충해 방제지원을 위한 실무접촉을 먼저 제의한 것은 잘한 일이다. 북한 정부의 화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급히 거둬들이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신뢰를 쌓아갔으면 한다. 남북 모두 서로를 비난하는데 힘을 소진하는 대신,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화해와 협력 시대의 물꼬를 터나가기를 기대한다. 중국만이 살 길이라는 소리 대신, 남한과 손잡아야 산다는 확신을 북한 주민들에게 줄 수 있는 대사변의 해가 되었으면 한다.

■ 사회

아침밥만 세 번 차리는 이유

지은씨는 매일 아침밥을 세 번씩 차린다. 식구라야 시부모님과 지은씨 부부, 그리고 두 딸 해서 6명이 사는데 아침상을 왜 세 번이나 차리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지은씨는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조곤조곤 사연을 얘기했다.

“저는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불이 없으니 어둠을 더듬어 부엌에 내려앉아요. 그러면 삭정이와 검불을 집어넣고 성냥으로 불을 피죠. 빨간 불길이 아궁이에 일면 그나마 집안이 희미하게 밝아져요. 온기도 도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전 그 시간이 제일 좋아요. 옥수수 500g 정도가 그날 아침과 점심 식량이에요. 여섯 식구가 먹자면 1kg는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막 먹어치우면 열흘 분 식량을 5일이나 먹고 거덜이 나겠으니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낮이 짧고 밤이 기니 적게 먹고 움직이지 말고 날이 어두우면 일찍 자리에 누워서 자야 해요.

예전에는 다 같이 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요즘엔 시부모님이 아들과 같이 식사를 안 하세요. 같이 밥을 먹으니까, 우리 세대주가 자꾸 자기 밥그릇에 있는 밥을 덜어서 시부모님께 드리고, 염장 무라도 더 많이 드시라고 양보하거든요. 먹을 것 없는 상차림에 날이면 날마다 아들이 그렇게 주니, 시부모님들은 아들이 한 수저라도 더 먹어야 힘을 내서 일을 할 게 아니냐며 아예 아들과 같이 식사를 안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먼저 먹고 일을 나가면, 그 다음에 나머지 식구들이 식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어요. 시부모님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많이 먹고 아프지 말아야 집안을 이끌고 버텨 나갈 수 있다고 믿으시니까요.

일 나가는 남편을 위해 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밥 한 그릇에 새하얀 배추김치 한 접시, 무 오가리 장 무침 한 접시, 감자 국 한 사발을 내놓아요. 요즘 고춧가루가 너무 비싸서 김치를 하얗게 그냥 절였어도 이만하면 괜찮은 아침 식사죠. 점심과 저녁은 대충 먹어도 아침은 잘 먹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래서 아침밥만은 꼭 따스한 새 밥을 지어드리고 감자 국이든 무국이든 국을 꼭 끓여내요. 정 없으면 따스한 맹물이라도 꼭 한 그릇 떠서 밥사발과 나란히 올리죠. 국에다 밥을 말아 먹으면 배도 채우고 수분도 보충할 수 있어서요. 이 추운 겨울에 일하다가 갈증 나면 어디서 따스한 맹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나 싶으니, 갈증 나지 마시라고 국이라도 챙겨드리는 거죠.

남편이 한 술 뜨고 일어나면, 7살짜리 딸애와 5살짜리 작은 딸애가 그 다음에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세수도 안 하고 말똥하니 앉아 아버지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요. 아직 철이 없어서, 아버지가 그만큼만 드시고 이제 나머지 밥을 자기들 밥그릇에 덜어주기를 기다리는 거죠. 남편은 그런 아이들의 눈치를 빤히 잘 알기 때문에 밥을 꼭 한 두 숟가락씩 남겨요. 아버지가 일어나면 바로 두 딸아이가 밥상에 달려들어 숟가락부터 움켜들어요. 전 그때 애들 밥을 떠서 두 번째 상을 차려요. 큰애는 좀 머리가 굵었다고, 자기 밥그릇 밥부터 먹지만, 작은 애는 아버지가 남긴 밥그릇부터 제 앞으로 끌어당겨놓고 먹곤 해요.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입 하나가 무서워서 금세 김치도 떨어지고, 국도 동이 나요. 반찬이 바닥이 나도 더 채워주지 못해요. 좀 남은 반찬도 상 밑에 끌어내려놓고 애들이 더 못 먹게 하죠. 시부모님도 드셔야 하니까요. 아이들은 감자국 그릇에 밥공기를 거꾸로 쏟아 넣은 밥을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금세 먹어치워요. 한 번도 더 준 일이 없어서 아이들도 더 달라는 소리를 안 해요.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요. 바깥 날씨가 지독하게 추워서 아이들을 내보낼 수가 없어요. 가마 목에 누워 있으면 춥지도 않고, 배도 덜 고프니까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누워 있을 때가 많죠.

시부모님은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상을 받으세요. 요즘 기침이 심해져서 밤새 고생하다가 새벽녘에나 주무시니까 그만큼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졌어요. 옥수수밥과 무오가리 장무침, 감자국을 두분 다 똑같은 양으로 내드리는데 그릇은 남편 그릇에 비하면 더 작아요. 김치 같은 건 남편과 아이들이 다 먹을 때면 못 드릴 때도 많아요. 남편과 아이들 밥을 챙겨준 뒤에 저도 시부모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저는 밥그릇을 절대 상위에 올려놓고 먹지 않아요. 다른 밥보다 아무래도 거칠고 양도 적으니까, 괜히 시부모님이 눈치 보고 저 때문에 못 드실까 싶어서요. 시부모님도 제가 이렇게 먹는 이유를 모를 리야 없겠지만, 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해요. 시부모님도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처럼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가 쉽니다.

이렇게 우리 집은 매일 아침상을 세 번 차립니다. 설거지를 끝내면, 저는 고이 남겨 놓은 밥 한 그릇을 가마 목에 잘 덮어둬요. 남편이 일하고 돌아와 점심식사를 할 수 있게요. 나머지 식구들은 점심을 못 먹은 지가 벌써 4년이 넘었어요. 아침 먹고, 저녁 먹으면 그만이죠. 우리 집만 그러나요?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하루에 두 끼 먹는 집이 태반인데요.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이제는 점심 때가 되어도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점심을 먹는 사람들은 간부나 화교들, 아니면 돈 잘 버는 장사치들이겠죠. 식사 준비와 설거지, 그리고 점심식사까지 챙겨놓고 나면, 저는 삭정이라도 주우려고 마을 뒷산에 나갑니다. 한 식구가 한상에 모여앉아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을 먹을 날이 언제나 올지 모르겠습니다

빚 독촉에 목숨 걸고 도강

함경북도 청진에 사는 정옥씨는 지난 해 12월 10일경 도강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 중국에 사는 남편의 작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국경연선지역에서 더 이상 총소리를 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렸지만, 당시만 해도 너무 살벌해서 감히 넘어갈 꿈을 못 꿀 때였다.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도 지금은 조용히 엎드려 있어야 할 때라고 말렸다. 하지만 정옥씨는 빚 독촉을 당하고 있어 절박했다. 돈주들은 껄렁껄렁한 사내들을 보내 허리를 다쳐 누워있는 남편에게 빚을 갚지 않는다고 발길질해 냈다. 미친 여자처럼 사내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울고 불었다. 사내들은 한 달 말미를 주겠지만, 더 이상 봐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더 팔 세간도 없고, 돈을 꾸어 돌려막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더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 날마다 홀로 눈물을 삼키던 정옥씨는 콱 죽어버릴까 생각을 하다가 10년 전 도움을 받았던 중국 친척을 떠올렸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도강을 한 번 해보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청진 수남시장 북쪽 골목에서 허술한 버스를 탔다. 최근에 버스비가 만원으로 올랐는데, 내가 떠날 때만 해도 5천원이었다. 버스 유리창은 다 깨져 성한 것이 없었다. 깨진 창 틈새로 칼바람이 들어오곤 했지만, 비좁은 차안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탓에 그리 춥지 않았다. 버스는 수성, 석막, 장흥을 지나쳐 회령으로 가는 동안 초소를 다섯 번 지났는데,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고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어도 어쩌다 초소병들 눈과 마주치면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공민증을 보이면 그대로 보내주는 분위기였다. 버스는 아주 힘겹게 무산령을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면서는 다소 속도가 빨라졌다. 아침 9시에 떠났는데, 회령에 들어선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150리길을 5시간 넘게 걸린 것이다. 버스 속력도 속력이지만, 초소에서 공민증을 검사하느라 지체한 시간도 길었다. 회령에서 500원을 주고, 유선으로 가는 서비차를 탔다. 10년 전에 도강할 때 도움을 받았던 이의 집을 찾아가는데 기억을 더듬으며 가느라 또 시간이 걸렸다. 연선지역 사람들은 워낙 추방을 많이 당한 터라 그 사람이 아직 거기 살아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길에 하늘이 도왔는지 그때 그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머니도 금세 나를 알아보고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했다. 마침 저녁때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어서, 가방에서 주먹밥 두 덩이를 꺼내 아주머니와 하나씩 나눠 뜨거운 물에 말아 먹었다. 둘이 나란히 가마 목에 누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도 나를 보자마자 바로 눈치 챘기 때문에 얘기는 쉽게 풀렸다.

아주머니는 10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그때는 어지간하면 경비대가 길을 열어주었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더 본다고 했다. 뭘 하러 가는 사람인지, 혹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지, 무슨 물건을 가지고 가며, 누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지 등등 세세하게 따지기 때문에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도강자는 무조건 반역자로 취급하는 분위기라 어지간해서는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돈 몇 푼 바라고 잘못 도왔다가 철창신세를 질 수 있어서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흔들기에 딱한 집안 사정을 얘기했다. 10년 전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중국 친척집을 찾았을 때 작은아버지 내외 모두 건강하고 유족한 편이어서 인민폐 2만 위안을 도움 받았다. 그 돈으로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 우리 부부해서 여섯 식구가 한 3년 시름없이 잘 살 수 있었다. 시동생을 결혼시켜 분가시키고 시누이를 시집보내고 나니, 또 아이 둘이 태어나서 식구는 다시 6명이 되었다. 그 뒤로 시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남편도 농장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친 것이 고질이 되어 힘든 일은 하지 못하게 되면서 살림살이는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받은 돈은 다 써버리고, 가정기물과 옷가지들을 중고 시장에 팔아서 식량을 사먹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없어져서 꿔먹기 시작했다. 빌린 돈을 갚아줄 구멍수는 없고, 그러다나니 그렇게 좋던 집을 팔아 단칸짜리 땅집에 들면서 빚을 갚아야 했다.

텃밭 500평방 딸린 독집으로, 울타리를 높고 든든하게 둘러막고 남새를 심으면 한 열세대가 족히 먹을 수 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집이었다. 지금 팔면 400만원은 받을 수 있을 텐데, 급하게 내놓느라고 제값을 못 받은 게 지금도 속이 쓰리다. 새로 이사한 집은 20평방이나 되는 면적에 텃밭이라야 30평방도 되지 않는 문화주택이다. 그것도 5세대가 한 룡마루에 붙어 있는 개인집이다. 빚은 늘어만 갔다. 봄에 옥수수를 100kg 꾸고, 가을에 200kg를 주기로 하였는데 3년 내내 제대로 갚은 적이 없다. 심한 빚 독촉에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농장의료보건소에서 의사로 일하는 먼 친척 되는 선생한테서 진단서를 떼서 직장에 얼마간 말미를 받아 이 길을 오게 됐다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었다.

이번에 또 한 번 도와주시면 절대 서운하게 하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고 힘주어 약속했다. 아주머니는 가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정 그렇게 원하면 한 번 해보자며 길을 찾아봐주었다. 일주일을 더 머물고서야 저녁 8시부터 9시 사이에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어떤 젊은 사내가 와서 강을 건네주고 받아주고 다시 아주머니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에 인민폐 2천 위안과 장백산표 담배 두 막대기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마하고는 준비해둔 주먹밥 3개와 볶은 옥수수 한 공기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혼자 그 사람을 따라나섰다.

두만강 위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었을까. 사방을 분간도 못하는 어둠 속에서도 그 청년은 용케 약속장소를 알아보았는지, 어느 지점에 도착하니 나지막하게 휘파람소리를 세 번 냈다. 그때 숲속에서 어깨에 총을 멘 군인 두 명이 나오더니 손짓을 했다. 같이 왔던 청년은 어느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만 혼자 남았다. 이번에도 무작정 그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따라 가니, 10분이나 지났을까. 조금 걸으니 하얀 얼음 강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어붙은 두만강이었다. 그때부터 뒤도 안돌아보고 강 건너편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세상을 향해 숨이 헐떡이도록 뛰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흙을 밟는 순간 그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작은 아버지 내외는 여전히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다만 두 분이 10년 전보다 더 늙고 힘이 없어 지원을 그때만큼 못해주어 미안하다며, 인민폐 1만 위안을 건네주셨다. 길안내를 해준 청년에게 2천 위안과 장백산 담배 두 막대기에 아주머니의 알선 사례비 등 이러저런 서비 값을 떼고도 6천 위안이 넘게 남았다. 그 돈으로 내리 3년이나 빌린 옥수수와 꾼 돈을 갚고 나니, 우리 돈으로 80만원이 남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강을 건너니 살 길이 열렸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중국 다녀온 뒤에도 뇌물 바쳐야

림일씨는 중국에 가서 사야할 꼭 필요한 물건들 목록부터 챙겼다. 부모님께서 드실 약이 제일 많았지만, 보위부원이 꼭 구해달라고 한 것도 많았다. 종이장에 연필, 공책, 복사지, 사진, 필름 등 사무용품에 폐렴약과 간염약도 구해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폐와 간이 나쁘다고 했다. 보위부원 동지는 다 사봐야 인민폐로 500위안도 안 될 거라면서 웃었다. 림일씨는 기가 차 “인민폐 500위안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 농장에 10년 넘게 꼬박 출근해야 현금 분배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냐. 작년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출근했어도 연말 분배 때 겨우 1만 8천원 탔다. 그것도 한꺼번에 안 주고, 세 번에 나눠준다고 6천원밖에 못 받았다. 만8천원 다 받는다고 해도 요즘 시세로 하면 인민폐 40위안도 안 된다”고 보위부원 동지의 부탁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보안원 동지가 부탁한 물건도 9가지나 되었다. 림일씨는 전기가 없어 텔레비전도 못 보는데, 보안원 동지는 전기요를 사달라고 했다. 림일씨는 소문을 들으니 전기 제품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하니 “보안원 동지가 세관에 자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자기 이름만 대면 다 봐 줄 것이라고 해서 못 가져오겠다는 말을 더 못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전기 제품도 어지간하면 봐주고, 중고 옷들도 깨끗이 씻어서 잘 다듬으면 다 들어 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세관원들에게 담배 몇 막대를 쥐어줘도 통과가 어렵다. 림일씨도 중고 옷을 받아와 장사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요즘 단속이 워낙 심해서 기대를 안 하기로 했다.

까다로운 정치 심사와 담화를 마치고 주의해야 할 점들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들었다. 절대 말조심하고 아랫마을(남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고, 기한 안에(1개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외사과 동지와 반탐부 동지에게도 뭣 좀 챙겨주려면 이모에게 최소 3천 위안 이상은 지원받아야 했다. 동료들은 이번에 나가면 또 언제 다시 도강증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나간 김에 일자리도 찾아보라고 했다. 아는 사람들은 체류기간이 지나도 몇 달씩 눌러 살면서 돈을 벌어온다고 했다. 림일씨는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집에서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 생각에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이모 집에 도착하니 쉽지 않았다. 이모네는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원을 넉넉하게 해줄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모가 워낙 그 동네에서 인심이 후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이모 소개로 가축을 키우는 한족 일을 거들 수 있었다. 림일씨는 화교에게 진 빚도 갚고, 간부들에게 줄 뇌물도 챙기고, 부모님께 드릴 약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법으로라도 도강을 하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지난 3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도강증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 너무 아쉽고 억울한 감도 들지만, 이제라도 다녀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돈 꾸고 멧돼지 잡아 도강증 발급 성공

림일씨는 최근 도강증을 발급받고,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이 다 중국에 살고 있는데, 워낙 멀리 살기도 하고 떨어져 산지 오래돼 얼굴도 모르고, 조선말도 모르는 한족처럼 되고 말았지만, 유일하게 룡정 삼합에 사는 작은 이모만은 간간이 연락이 닿았다. 다행히 그 이모가 친척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 친척 방문으로 도강증 수속을 시작했는데,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최근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람들 얘기로는 돈을 쓰지 않아서 늦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돈으로 적어도 2천 위안은 있어야 도강증이 나온다고 했다. 요즘 시세로 하면 돈 100만원은 들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림일씨는 “그 돈이 있으면 뭣 하러 친척방문을 하겠느냐, 너무 먹고 살기 바쁘니까 가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해보았지만,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모르면서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신기하다고 빈정거렸다. 림일씨는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지금껏 100만원을 가져본 적도 없고 본적도 없으니 그저 가만히 앉아 도강증이 나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림일씨는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지 않느냐. 내가 내 이모를 보러 가겠다는데, 그것도 몰래 도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속을 밟아 가겠다는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단 말이냐. 요즘은 세상이 통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런 림일씨가 딱했던지, 직장 동료들은 화교에게 돈을 빌려보기라도 하라고 몇 번이나 조언해주었다. 귓등으로 흘려듣던 림일씨도 작년 농사도 잘 안되어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이모의 도움을 꼭 받아야겠기에 같은 인민반에 사는 화교에게 월 이자 300위안에 중국에 다녀오면 본전과 이자를 갚기로 하고 돈을 꾸었다. 돈 빌리는 것도 쉽지 않아서 숱한 사람이 앞에 나서서 주선해주고 담보를 서주어야 했다. 이제껏 남을 속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림일씨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담보를 서주어 겨우 80만원을 연통할 수 있었다. 리당 비서에게 10만원, 외사지도원에게 10만원, 외사과장에게 10만원, 반탐과장에게 10만원, 반탐부부장에게 20만원, 그 외에 여기저기 20만원을 더 쓰니 돈이 부족했다. 림일씨는 겨울 산기슭에서 멧돼지를 잡아 보위부원과 보안원에게 각각 20kg씩 나눠주었다. 돼지고기가 1kg에 6천원이 넘으니, 한 사람당 최소 12만원씩은 준 셈이다.

돈 100만원에 멧돼지 한 마리를 바쳐서 우여곡절 끝에 도강증을 손에 넣고 보니, 감개무량했다. 림일씨가 도강증을 얻은 소식은 반나절도 안 돼 온 동네에 퍼졌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옛날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한 것처럼 온 동네가 야단이었다. 서로 인사도 안 하던 사람들까지 이제 살 길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웃는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넬 정도였다. 림일씨는 진짜 공화국의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이모 만나러 가는 게 큰 자랑거리도 아닌데, 이렇게 바쁜 세월에는 중국 친척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 정치생활

태양절 맞아 추가 대사령 예고

중앙당은 오는 4월 15일 태양절을 맞아 추가 대사령을 실시할 것을 전국 도당에 지시했다. 2월 16일 명절 기념 대사령에 이은 것으로, 최근 강도 높은 주민 통제에 불만이 높던 민심을 한결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1일, 함경북도 회령시 인근에 위치한 전거리 교화소에서는 대규모의 수감자 사면이 있었다. 중국에 도강했다가 붙잡혀와 3년 이상의 형을 받은 여성수감자들이 많았다. 형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출소된 여성들은 갑작스런 사면에 영문 몰라 하면서도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수감자와 관련이 없는 주민들도 2월 16일 명절을 앞두고 김정은 동지의 배려로 대사령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함께 반가워했다. 전거리교화소 외에도 전국 노동 단련대와 교화소 등지에서는 경제범죄를 비롯한 각종 범죄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실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