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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당근김치를 배우다

강순자 / 경주지회

2024년 5월 23일 오전, 고려인 교포 16명과 좋은벗들 활동가 15명이 참가한 ‘좋은 이웃의 날’ 행사가 경주시 성건동 행정복지센터 2층 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좋은벗들 활동가들은 고려인의 애환이 담겨 있는 ‘당근김치’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를 구할 수 없는 러시아에서 고국의 김치를 그리워하며 만든, 당근으로 대신한 김치입니다. 러시아어로는 마프코프차(또는 마르코프채)로서 ‘마르코프’는 당근, ‘차’는 반찬이라는 뜻입니다. ‘차’는 우리말 ‘무채 나물’, ‘채 썬다’ 할 때의 ‘채’가 변형되어 ‘차’가 된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날 행사장에 들어선 고려인들은 활동가들을 보고 먼저 반갑게 웃으며 포옹을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고려인은 경주지역이 주최하는 한국어 수업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전 행사에서 만난 적도 있었기에 어색함이나 낯설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친숙하고 편한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활동가 2명과 고려인 3~4명으로 구성된 다섯 개의 조로 참여 했습니다.

<사진 1> 고려인들과 활동가들의 반가운 만남

행사는 이승헌님의 사회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건동 동장님 소개에 이어 손재선님, 공영순님이 짧은 환영인사를 했습니다. 권신옥님은 음식 만들 때 알아야 할 사항을, 사회자는 각조에서 수행해야 할 미션을 발표 했습니다. 행사 장소가 주민센터 회의실이기에 모든 조리도구는 활동가가 준비 했습니다. 가져온 도마와 칼, 채칼, 행주, 양푼, 접시, 수저 등은 탁자 위에 세팅했습니다. 고려인의 설명을 들으며 껍질을 말끔하게 벗기고 채썰기를 시작 했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채썰기는 매우 단순하고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수다를 떨고 웃고 떠드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필요 했습니다. 센스 넘치는 사회자는 ‘서로 알아가기’ 미션을 준비 했습니다. 고려인이 직접 자신과 활동가의 이름을 한국어로 썼고 이름표를 만들어 옷에 붙였습니다.

<사진 2> 고려인의 한국어 이름 쓰기

고려인의 한국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고 언제 왔고 누구와 살고 등등 묻고 답했습니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묻고 또 물었습니다. 묻고 답하는 수다로 행사장이 시끌벅적 했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우리조 고려인은 모두 60대 이상이었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분이 많았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없냐고 물었더니 “고려인은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딸과 함께 산다”고 북한 사투리로 답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표정을 지었더니 하하하 웃으시며 아들쪽 손자들은 다 컸고 딸쪽 손자들은 아직 어려서 도움이 필요해 같이 산다고 웃으며 다시 말했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양푼 가득했던 당근은 곱게 채썰어져 수북이 쌓였습니다.

<사진 3> 당근 채썰기

당근김치, 마프코프차는 소금에 절인 당근을 고춧가루와 마늘을 섞은 양념에 버무리는 것이 우리의 김치와 같았습니다. 다른 점은 마늘과 양파를 기름에 볶고 식초, 올리브유, 고수씨앗 거친 가루와 함께 섞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절이와 서양 샐러드의 조합으로 탄생한 오묘하면서도 맛있는 요리였습니다. 서로 겉돌지 않게 양념이 아주 잘 어우러졌습니다. 밥과 함께 먹어도 맛있겠지만 행사 당일은 구운 빵에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두말 하면 입 아플 만큼 정말 맛있었습니다.

<사진 4> 당근 김치 샌드위치 만들어 먹기

다른 조가 만든 당근김치를 맛보며 약간의 양념 차이가 만들어 내는 큰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품평회에서 1등에 선정된 조는 박수와 환호성의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미션 수행 결과 발표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조별로 활동가가 고려인 이웃을 소개했습니다. 어떤 조는 요리는 안하고 미션 수행만 했나 할 정도로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발표 했습니다.

또 어떤 조는 김치 만들기에 집중하다 미션 수행을 제대로 못해 고려인이 자신을 직접 인터뷰 했습니다. 미션과는 다른 형식이었지만 오히려 참신했고 고려인에게 직접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좋았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다가가게 되고 고려인과 우리가 서로 따뜻하게 챙기는 이웃이 되었습니다.

행사 마지막 차례로 다함께 사진 촬영을 하던 중, 갑자기 고려인 한 분이 카츄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많은 분들이 따라하더니 앞으로 나와 춤을 췄습니다. 고려인과 활동가도 함께 어우러져 춤을 췄습니다. 한국어 수업시간에 자주 불렀던 노래라 익히 알고 있었고, 박수 치고 장단 맞추며 4절까지 이어 부르니 흥겨운 파티가 되었습니다.

이번 행사는 많은 것을 알게 해 준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낯선 나라에 살던 교포에게 우리의 것을 알려주려 애쓰는 것보다는 우리가 그들을 먼저 알려고 하는 노력이 더 중요했습니다. ‘한국의 음식은 이런 것들이 있어요.’ 보다는 ‘어떤 음식을 먹었어요? 우리도 배우고 싶어요.’라며 접근한 이번 행사가 진정한 이웃이 되는 방법을 제시한 것 같아 정말 뿌듯하고 보람찼습니다.

손재선님이 앞선 환영인사에서 배우기 힘든 러시아어 인사를 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려인의 노래 카츄사를 배워 같이 부를 수 있어야, 그들을 먼저 알아야 ‘세상의 누구와도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진 5> 행사 마치고 단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