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_김윤희
북녘의 추석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낯설기보다 우리와 닮은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란 김윤희 님은 지금 북한 사회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좋은벗들과 인연을 맺어, 남남북녀의 사랑을 그린 연극 ‘개성 불시착’에 함께했습니다. 김윤희 님의 기억을 따라, 북한의 추석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안에 담긴 가족과 고향을 향한 마음을 만나 봅니다.

남녘에서 맞는 추석, 쓸쓸함과 그리움
하늘은 높아지고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올해 추석은 유달리 빨리 찾아오는 듯싶다.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는 이날은 남과 북이 함께 쇠는 가장 큰 명절이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 맞는 추석은 내게 가장 쓸쓸한 날이다. 부모님 산소에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는 불효녀가 되었다. 내 땅인데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추석만 되면 나를 더욱 서럽게 한다.
북에 있을 때 나는 남한 사람들이 추석을 어떻게 쇠는지 궁금했다. 방바닥에 엎드려 몰래 KBS, MBC 라디오를 들으며, 고속도로가 막히고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풍요로운 남녘의 정경을 그려 보곤 했다.
“남한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이 조상을 기리는구나.”
“북녘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은 어떻게 쇨까?”, “그들도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이 명절을 맞겠지.”
형제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같은 민족이라는 정과 동질감을 느꼈다.
북녘 추석, 조상 앞에 차린 정성
내가 살던 북한에서 추석은 연중 가장 잘 먹는 날이었다. 조상 덕에 쌀밥을 먹고, 그토록 소원하던 고기와 생선을 제상에 올렸다가 나누어 먹었다. 다만 비늘 없는 생선이나 소고기는 제상에 올리지 않았다. 소를 조상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석 전날이면 장마당의 먹거리가 말끔히 팔려나갈 만큼 큰 대목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을 겪은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7촌까지 모여 추석을 쇠었다. 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이었으므로 친척들은 제사 음식을 꾸려 들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여자들은 밤새워 송편을 빚고 생선을 구웠으며, 남자들은 구들장에 앉아 카드놀이를 하거나 덕담을 나누었다. ‘조상님 잡수시기 전에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주의에도 나와 5촌 조카는 마당에서 전을 부치며 몰래 입에 넣고 히닥거렸다. 어머니는 샘물을 길어다 정성껏 제사 음식을 만드셨다.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의 앞날이 잘 풀린다는 믿음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힘들수록 간절해진 제사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 조상님 제사는 복을 비는 자리로 바뀌어 갔다.
“할아버지, 요즘 살기 힘든데 부디 돈 많이 들어오게 해 주시고 먹을 걱정 없이 살게 해 주세요.”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제상을 차려 놓고 저마다의 소원을 빌곤 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사 때마다 어머니는 “외아들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라며 두 손 모아 비셨다.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 뭘 안다고……”라고 퉁명스레 말씀하셨다. 평소 옥수수밥에 국 한 그릇 덩그러니 차려 주시던 어머니가 없는 돈을 털어 고기며 생선을 조상의 제상에 올리는 것이 못마땅하셨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흥정하면 부정 탄다며 장마당에서 제일 좋은 것만 골라 사 오셨다.
경제난이 심해지면서 제사 음식 장만하기가 어려워졌다. 술 한 병 살 돈이 없어 물을 술병에 담아와 술 대신 붓는 이들도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사람들은 조상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다.
조상의 묘 앞에서, 만남과 뿌리
북한에서는 추석이면 산과 도로가 사람 천지로 변한다. 화장하는 경우가 드물어 산이 묘지로 가득 찼으니, 그 무덤 수만큼이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빨리 가자, 남들 벌써 아침상 받았는데 우리만 늦으면 할아버지 노하시겠다.”
“남보다 먼저 조상님께 상을 올려야 복을 받는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른 아침 산을 올랐다. 길거리는 제상을 머리에 인 아낙네들,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우고 달리는 남성들로 붐볐다. 제사를 마치고 묘 주변에 둘러앉아 음복하며 집안 어른들의 가문 이야기를 듣는 이 시간은, 우리 세대가 정체성의 뿌리를 확인하는 거의 유일한 자리였다.
추석날엔 오랫동안 소식조차 알 길 없던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기도 했다. 중앙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고향의 선산을 찾아오곤 했다.
북어를 뜯으며 술 한 잔 들이켜던 사촌 오빠가 눈을 크게 떴다. 산등성이에서 인민군 대좌 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대좌는 북한군 영관급에서 가장 높은 계급으로, 남한의 대령보다 위에 해당한다.
“너, 태영이구나!”
둘이 부둥켜안고 반가워하는데, 이번에는 중앙당에서 일하던 고문화 아저씨가 나타났다. 셋은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한 학급 동창이었다. 취기가 오른 오빠가 소리쳤다.
“야, 고문화! 너 학교 다닐 때 내 책가방 메다 주던 생각 안 나?”
학창 시절 아이들의 대장이었던 오빠 앞에서 두 친구는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세 사람은 어느새 풋밤송이 머리를 한 옛 소년들로 돌아갔다. 조상의 무덤 앞에서는 위계도 잠시 사라졌다. 성묘는 이렇게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오랜 인연을 다시 만나게 했다.
추석은 사람과 사람을 다시 잇고, 조상과 후손을 하나로 묶어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동대천 기슭의 김촌마을은 우리 가문의 집성촌이었으며, 역도산의 고향이기도 하다. 집안 어른들은 모여 앉으면 세계프로레슬링 왕자 역도산으로 이름을 알린 김신락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하셨다.
사실 역도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빼고 나면 우리 가문에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반면 건너편 고촌마을에는 중앙의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큰아버지는 고씨 가문은 선산이 좋기 때문이라 하셨다. 우리 가문은 선산의 지맥이 끊겨 후손들이 번성하기 어렵다는 말씀도 덧붙이며 한숨을 내쉬셨다.
집안의 흥망을 선산과 연결해 생각하는 모습은 남과 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조상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산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후손이 조상을 정성껏 모시고 섬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부모님 산소에 큰절을 올릴 그날
나는 부모님의 산소에 큰절을 올릴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희망을 안고 해마다 추석을 맞는다.
어머니는 생전에 들국화를 가장 사랑하셨다. 들국화는 찬 서리와 칼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거친 들길에 피어난다. 그 모습이 좋아 나 또한 이 꽃을 사랑한다. 십대 소녀 시절에는 일기장에 ‘나도 들국화처럼 살리라’라고 써넣기도 했다.
지금은 들국화를 본떠 떡을 빚어 추석 제상에 올리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 그렇게 나는 들국화에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는다.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고향의 오솔길을 따라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는 그날이 오면, 그곳에는 생전에 어머니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들국화가 피어 있겠지. 그 들국화는 어머니의 환한 미소이고, 얼굴을 스치는 솔솔 가을바람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딸을 어루만져 주시는 아버지의 따뜻한 숨결이리라.
예전처럼 묘 주변에 친척, 형제들과 둘러앉아 부모님이 평생 드셔 보지 못했던 음식을 제상에 차려 놓고 음복하면서, 한 많은 그리움을 터뜨리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분단 가족에게 통일은 오랜 세월 헤어져 살아온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38선 너머의 혈육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난 이들과 살아 있는 이들 간의 기적 같은 해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