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꿈

-하늘(가명, 30세 여성, 평남 평성 출신)

북한에서

어려서부터 내 꿈은 그리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았다. 유치원 교양원이 되어서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서 재미있는 것들을 골라 도란도란 얘기해 주면서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재봉사를 꿈꾸어 보았다. 어머니가 장만해 놓은 큰 양목천을 ‘뚝’ 잘라서 뭔가를 만든다고 법석을 떨다가 엄마한테 혼나곤 했었다. 그렇지만 이 작은 소망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무엇을 해야 하나?‘ 한창 고민할 시기에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광산의 선광장으로 집단배치 되었다. 소위 ’장군님 말씀 관철‘이라면서 말이다. 영하 이삼십 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방한장치 하나도 없는 곳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내 꿈은 자연히 다른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냥 화목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오손 도손 살아가고 싶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아껴주며 사랑하면서 남들처럼 그렇게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는 이룰 수 없었다. 98년도 나의 평화로운 꿈을 깬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사람은(인신매매 죄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짐) 우리에게 자기가 보고 온 중국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주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가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에게 ‘중국에 가서 꼭 도움을 받아서 오겠다‘ 는 한마디 말만 남겨놓은 채 그 사람을 따라서 고향을 떠난 지가 벌써 육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변방대의 눈을 피해 화룡현의 한 농가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왔고,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항상 우리는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가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다시 살아 보고 싶은 세상이며 둘도 없는 지상낙원이라고만 교육받아 왔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생각, 배신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암흑의 세상같이 느껴졌던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지기도 했다. 혹시 붙잡히면 사회에서 완전히 낙인찍힌 채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살이 떨리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해서 번 것으로 먹고 입고 쓰고 살았다. 거기에다 여동생도 둘씩이나 있었으니 나라도 돈을 벌어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금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날 위해서 좋은 자리를 알아봐주는구나‘ 하고 고맙게만 생각했었다. 한밤중에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서 산속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미안스럽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돈에 팔리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중국에서

그렇게 시작한 나의 중국 생활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달이 멀다하고 벌어지는 중국공안의 북한사람들에 대한 검거작업, 후진국에서 왔다고 깔보는 중국조선족들의 이상한 눈길과 어투, 툭하면 던져지는 것이 비난과 의심의 소리였었다. 특히 2002년은 중국공안들의 검거가 심했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안되는 갓난아기를 안고 이웃집에 피신했어야 했다. 이런 숨막히는 일들이 한두 달 건너 한번씩 계속 되었다. 기억하기로 그 해 9월 31일에는 아예 마을에 들어와서까지 못살게 하니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죽든지 살든지 간에 한국에 가야 한다고 혀를 물고 결심했다. 8개월 밖에 안 되는 아이를 남편에게 떠맡기고 떠나 온지가 엊그제 같기도 하다. 헤어지기 며칠 전부터 아이가 갑자기 앓으면서 그냥 보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머무를 겨를이 없었던 나는 주사 맞는 아이를, 떨어지지 않겠다고 우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 놓고 기차에 올랐다. 나는 저주한다. 나와 나의 아이를 떼여놓은 그 중국정부를.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누구에게 피해를 준적도 없었고, 다만 생활이 어려워 장가 못 드는 사람에게 가정이라는 소중한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도 큰 죄가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국에서

한국에서의 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정말 많이 해왔다. 무엇보다 돈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돈도 벌어봤다. 추운 냉장고 안에서 일하다 보니 몸이 따라주지 않아 그것도 석 달 밖에 하지 못했고 다시 건설장에서 천정 붙이는 일을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라도 제대로 배워서 정통하고 싶었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한국까지 온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오면서는 단지 자유만을 꿈꾸고 왔지만은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시기와 처한 상황에 맞게 변하는 법인가 보다. 그냥 배우고 싶었고 뭔가를 하고 싶었다.

며칠 전 나는 4개월 과정의 PC정비과목을 무사히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다른 이들도 그러하겠지만 나에게는 감회가 더욱 남다르고 새롭다. 대학졸업증도 아니고 자격증을 딴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기쁘겠는가?‘고 웃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노력하여 한 가지를 배웠고,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신심이 생긴 것이다.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 쉽게 지치고 포기하는 나로서는 서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원 하나로써 내 배움의 길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 다음은 더 높게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해갈 것이다. 그래야만이 나중에라도 통일이 되면 친척, 친우들에게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다는 것을 떳떳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리라.

내가 어렵고 지칠 때 곁에서 열심히 응원해주고 격려와 힘을 준 ‘좋은벗들’ 식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격려해주고 도와준 어머니와 동생들에게도 감사한다.

글쓴이 소개

하늘님은 하나원 37기를 졸업하고, 하나원 남한역사기행으로 좋은벗들과 인연이 되어 틈틈이 찾아와 늘 밝은 얼굴로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